결혼방학 Part 1 - 떠남 _#1
What was once thought; can never be unthought.
- Friedrich Dürrenmatt
한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마음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기로 했습니다.
이 마음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까 두렵습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에, 이 결심을 조용히 내 안에 품습니다.
나는 비밀을 간직한 채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오릅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잠시 방학입니다.
“잘 지내고 있어.”
“잘 다녀와. 건강 잘 챙기고.”
당신과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자동출입국 심사를 마쳤습니다.
지문을 올리고 카메라를 응시하자마자, 몇 초 만에 출국 심사가 끝났어요.
아무런 지체가 없었습니다.
나는 바람처럼 쉬이 경계를 넘어 출국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탑승까지 1시간이나 남아 있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커피를 마시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출국장 2층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어요.
공항 출국장에서 당신이 아닌 친구와 마주 앉아 있던 나는 뭔가 낯설었습니다.
내가 공항에, 그것도 출국 직전에, 당신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친구의 ‘함께라 다행이야.’라는 말에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당신이 아닌 누군가와 이렇게 멀리 떠나는 건 처음이거든요.
여행길에 오른 나에게 둘이라는 건, 혼자보다 오히려 더 낯선 조합이었습니다.
불현듯, 이게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시련, 도전, 혹은 모험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확실한 건 이것이 나의 새로운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처럼,
이 여정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한 방랑일지도 모릅니다.
코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뱀처럼 허물을 벗고,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는 기회에 몸을 던져보려고요.”
나는 과연, 이 여정의 끝에서 어디에 가 닿게 될까요?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될까요?
아니면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혹은, 내게 불어온 바람을 따라가 보았다가
결국 당신에게, 보다 온전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될까요?
비행기 창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한국의 해안선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운전하고 있을 당신을.
그리고 언젠가는 전하게 될 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
늦은 밤 도착한 피아르코 공항은 국제공항이지만 제주도 공항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어요.
인구 140만의 나라, 그 경제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우리를 픽업 나온 친구의 파트너는 대충 봐도 밀레니엄 전에 나온 듯한 오래된 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차에 실려 숙소로 이동했어요.
붉은 천을 가로지른 검은 선의 커다란 국기가 멀찍이서 펄럭이고 있었고,
차창 밖의 카리브해 습기와 바람이 고스란히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나는 한국을 떠난 지 마흔 시간 만에 트리니다드 앤 토바고에 도착했습니다.
반년 전 만해도 와 보리라 혹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 없는 정말 낯선 곳에 있어요.
제게는 모기장이 달린 싱글 침대와 작은 책상이 있는 방이 주어졌습니다.
코 끝에 느껴지는 묵은내에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방을 부랴부랴 청소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행히 방 안에 화장실이 딸려 있어 작지만 독립적인 이 공간이 괜찮다 싶었습니다.
간단히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한 뒤, 공항에서 가져온 트리니다드 앤 토바고 지도를 노란 벽에 붙였습니다.
완전히 닫히지 않는 철제 창문이 마음에 걸렸지만, 닫는다 한들 이 무더위에 문을 닫고 잘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괘념치 말자 생각했어요.
긴 잠옷 바지를 입고, 조심스레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습니다.
혹여라도 발이 모기장 밖으로 나갈까, 그 때문에 모기들이 들어올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부디 이 얇은 막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낯선 곳에 나를 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 모기장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어쩌면 이 여정이 나를 당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 바람이 어디로 불어갈지 모릅니다. 낯선 곳에 나를 뉘인 채, 나는 당신에게로 돌아갈 길을, 혹은 당신이 아닌 나만의 길을 조용히 탐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