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방학 Part 1 - 떠남 _#3
나는 평생 센 척만 하다, 당신을 만나 처음으로 약한 척을 했던 것 같아요.
그건 내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습관이 된 걸까요. 요즘은 문득 내가 원래 약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자잘한 것들이 괜히 불편해지는 걸 보면서요.
마치 들판의 민들레가 온실 속 화초로 변한 것처럼.
척하지 않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낯선 곳의 불편 앞에서 실제적 문제보다 심리적 불편을 먼저 느끼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친구 커플과 트리니다드 수도 포트 오브 스페인(Port of Spain)에 갔습니다.
일이 먼저 끝난 나는 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고 혼자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핑계는 ‘일을 하겠다’였지만 사실은 혼자 있고 싶었던 거죠.
퀸스 사바나에서 코코넛을 샀지만, 녹슨 칼의 찜찜함에 젤리를 절반이나 남겼어요.
땡볕의 사바나에는 만개한 Yellow Poui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 더위에도 시들지 않는 건 땅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겠죠.
지쳐 흐느적대던 나는 ‘뿌리를 내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바깥의 뜨거움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나를 붙잡는 마음의 에너지일지도 모르겠어요.
버스 터미널로 향하며 지나친 팬시한 카페가 잠시 아쉬웠습니다.
잠시 차라리 커피나 마실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죠.
포트 오브 스페인(트리니다드 수도)에 세번째 방문이지만 혼자 걷는 도시는 사뭇 달랐습니다.
자유로움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먼저 느껴졌으니까요.
City Gate Terminal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윙크하거나 인사하는 남자들, 땀 냄새와 튀김 냄새, 소카 음악, 알아듣기 힘든 스패니시와 크리올 영어.
피부색이 밝은 스패니시 화자들은 베네수엘라 난민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흑인, 인도계, 남미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유난히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허기가 올라왔지만 더블스 가판대의 까맣게 때 낀 손톱이 마음에 걸려 주문을 망설였습니다.
인도에서 본 가판 사내들도 그랬지만, 그땐 괜찮았던 일이 이제는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역시나 변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일까요?
나는 결국 더블스를 먹지 못하고 미니밴에 올랐습니다.
빨간 줄의 하얀 Maxi Taxi 안은 금세 꽉 찼어요.
비교적 앞자리에 앉은 나는 쿰쿰한 땀 냄새의 불편에서 나를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티라도 난 건지, 기사 아저씨가 반쯤 뒤돌아 내게 시선을 주며 물었어요.
“Allyuh good?”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내가 또 척을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괜찮은 척.
그 덕인지, 아니면 창밖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인지곧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매연 섞인 무거운 공기였지만, 나는 점차 경계를 내려놓고 편안해지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제 정말 여행자의 모드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직은 가슴속 가시들이 다 씻겨 나가진 않았지만,
나는 용기 내어 그 경계 밖으로 나가보려 합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고통이 아니라 낯선 여행의 문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