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확실한 방법

필사예찬

by 알깨는 아줌마

필사는 내가 해본 적이 없을 땐 많이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여겼다.

한 줄을 읽고 넘어가는 데 몇 초면 될 것을, 손으로 옮겨 적으면 속도가 10분의 1로 떨어지고 가독성 떨어지는 손글씨로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지 않은데 같은 글자를 왜 베껴 쓰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내가 처음 필사한 책은 “잠재의식을 지휘하는 방법(The Great Within)이었는데 “이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싶다,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번역본, 영어원본을 둘 다 적었었다.


지금 필사하고 있는 책은 “붙잡지 않는 삶-에크하르트 톨레”인데 첫 번째 책을 필사할 때와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이제는 좀 습관처럼, 의미를 많이 두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음악 틀어놓고 앉아서 옮겨 적다 보면 그냥 마음이 편안해져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계속하다 보니 이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지금-여기” 훈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의 한 문장을 또박또박 옮기는 그 순간,

내가 글자를 읽지 않고 기계적으로 손만 움직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바로 들킨다. 잡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흐트러지고 글자도 자꾸 틀린다. 이미 쓴 구절을 다시 쓰고 있다. 금방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 또박또박 천천히 예쁘게 쓰기 시작한다. 마치 명상에서 ‘다른 생각이 올라오면 호흡으로 돌아와라.’라고 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오히려 명상할 때보다 알아채기가 더 쉽다. 엉뚱한 생각의 나래를 펼쳐내기도 전에 내 글자가 먼저 흐트러 지기 때문이다.

필사는 그렇게 나를 “지금, 여기”로 즉시 소환한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 여기”를 이야기 하고 있음도 한 몫한다.)


우리 집은 여름 방학이 두 달 반째,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내 애가 세 명이다. 말이 끊이지 않고, 뛰어다니고, 싸운다. 추가로 친구들도 몰려온다. 지들끼리 모이는 장소 순서를 정해놨는데 오늘이 우리 집이다.


아이들이 오기 30분 전부터 식탁에 앉아 필사를 시작했다. 하나둘씩, 어떤 아이들은 마당문으로 또 다른 아이들은 현관문으로 쏙쏙 도착하고 있다.

“으, 시끄러워~~” 하고 몸에 힘을 주는 대신 입가를 조금 올린 후 이렇게 속으로 외친다.


“항복! 항복! 그래 항복이다!~~“


저항하지 않으니 가벼워진다. 짜증도 뭐 그리 많이 나지 않는다.

시끄러움은 그대로인데, 내 속은 정말로 덜 시끄럽다.

애들의 떠드는 소리를 그냥 풍경처럼 흐르게 놔두며 난 톨레의 글을 계속 옮겨 적는다.


필사는 그렇게 나에게

삶 속의 불가피한 소음과 혼란에 항복하고,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연습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아이들의 소란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오늘은 뭐든 다 괜찮다! 내일이 개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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