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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Apr 11. 2022

러시아 겨울 덕에 혹은 탓에. 참을 인인인

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한국은 봄의 한가운데인가보다. 인스타그램 피드가 벚꽃밭이다.


시작부터 잠깐  길로 새자면, 인스타그램 보려얼마나  마음을 먹었는지.

러시아에서 인스타그램이 막힌지 벌써 2-3 됐나보다. 원래도 간간히 접속해서 지인들 게시물 '좋아요' 누르는 수준이인스타그램  하면 그만이지 싶었는데,  '좋아요' 마저  하니 친구들이 올리는 한국 음식으로 대리만족도  하고, 한국에서는 뭐가 유행하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얼마 안 가 엄청난 아웃사이더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모바일 세계 까막눈인 내가 VPN이라는 것을 깔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VPN을 쓰겠다는 결정만 내가 하고, 설치는 남편이 해주었지만.

어쨌든 VPN이라는 기특한 놈 덕에 인스타그램으로 한국의 봄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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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려고 했던 얘기로.

한국은 인스타그램마저 봄인데, 러시아는 아직 겨울이다.

3월 말쯤 갑자기 기온이 10도 가까이 올라가길래 작년 10월부터 6개월간 이어졌던 겨울이 드디어 끝나고 봄이 오려나보다 했는데, 며칠전에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이제 새싹 좀 보려나했는데 그놈의 눈이 또 잔디밭을 뒤덮은 거다.

얼마나 기운이 빠지던지.


가만 계산해보면 겨울이 1년의 절반인 거다! 정말 황당한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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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질리는  날씨에 대해 러시아어 과외 선생님하고 이야기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배울 러시아어 교재 테마가 '성격'이었는데 '국가가 성격을 만드느냐' 질문이 있었다.

(기초 러시아 회화 교재가 이렇게나 심오하다니)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러시아는 러시아인에게 어떤 성격을 만들어줬냐고 물었다.


"러시아인은 정말 잘 참아. 이렇게 긴 겨울도 참아야 하니까"


러시아의 겨울은 러시아인에게 '참을성'과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게 굴 수 있는 '무표정'을 줬다고 했다.


'아, 이거다' 싶었다.

그간 나를 괴롭혀왔던 세월아 네월아 배달, 주문 받는데 하세월이 걸리는 모스크바 레스토랑,

나와 같은 상황임에도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이곳 사람들 때문에 항상 나만 성격파탄자가 돼버리던 것이 바로 러시아의 긴긴 겨울이 만든 '인내심' 때문이었다니!


끈질긴 추위, 일주일에 절반 이상 내리는 , 하루종일 햇볕없는 우중충한 하늘을   가까이 '그런가보다'하면서 참는데, 주문  늦게 받는  대수겠냐고 선생님은 덧붙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온지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러시아 사람들의 무던함과 무매너를 오가는 국민성의 근원이 이해가 됐다.


정치와 사회 현상을 바라볼때도 러시아인은 '인내'한다고 했다.


전쟁 이후, 생각보다 서구권의 경제 제재 타격이 심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상이 꽤나 휘청인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겪는 고통에 비할바 아니겠지만)


러시아인의 최애 패스트푸드였던 맥도날드가 문을 닫고, 스벅을 더는 마실 수 없으며, 해외 송금과 환전도 안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겨울을 피해 따뜻한 주변 국가 휴양지로 여행을 가곤 하는데, 피한(피서가 아니라 피한)마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생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은 요즘 시국을 늘 그랬듯이 참는 것으로 이겨내고 있다고 한다.


불평해봐야 겨울이 빨리 끝나고 봄이 오는 게 아닌 것처럼, 불만을 가져봐야 전쟁이 이들이 원하는 시점에 끝나지 않을 테니, 그냥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무관심하려 노력하며 모두 참고있다는 것.


언론에 나오는 전쟁 옹호자들은 사실 소수이고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은 그냥 인내하고 있는 거란다.


듣고보니 일면 안타깝기도 했다.

참아내야하는 척박한 자연환경 탓에 자연스럽게 말없이 견디는 법을 배워야했던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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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국인에게 어떤 성격을 만들어 줬냐는 선생님이 물었다.


러시아 사람들과 정반대이지 싶다.

절대 인내하지 않는다(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만 해도 최선을 다해 조급하다. 그리고 그런 점이 많은 경우에 미덕으로 비춰지곤 했다.

뭐든지 빨리 하고, 따박따박 따지려는 성격이 부지런하고, 적극적이고, 눈치 빠른 성격으로 포장되는 게 대한민국이다.


그러니 내가 이 나라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복장이 터지는 게 당연지사.


러시아에 꽤 오래 산 이웃은 러시아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참을성에 익숙해지는데 5년이 걸렸다고 했다.

여전히 이 국민성이 이해가 가거나 적응이 되지는 않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뭐 어쩌겠어' 싶어지는데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거다.


나는 아마 한국으로 돌아갈때까지 러시아인의 참을성을 참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비난의 시선으로 이곳 사람들을 보지는 말아야 겠다.

한국 사람들이 살아내기 위해서 빨라져야 했던 것처럼, 이곳 러시아의 사람들도 같은 이유로 이들의 국민성을 갖게 된 것이니 말이다.




** 꽃피는 춘삼월도 지난 4월 초, 모스크바에는 이런 눈이 내렸더랬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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