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본 2013년 여행
알래스카항공은 이번이 처음인데 나름 알차게 운영되는 항공사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착하면서 나온 기내 방송에서 그것을 느꼈다. 승객들이 부친 가방을 아무리 늦어도 30분 이내에 모두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베기지 클레임으로 갔더니.... 이미 가방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방도 그야말로 도착하자마자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때론 작은 서비스 하나가 회사 전체의 이미지를 좌우하기도 한다. 무료로 주는 건 음료와 약간의 땅콩뿐이지만, 아주 깨끗한 기내도 마음에 들었다. 승객의 시간을 배려하는 것도 좋았다. 다음에 이 노선을 이용한다면 알래스카항공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들었다. 그런데 가방을 찾고 보니 우리 가방에 first class/ priority라는 빨간색 스티커가 손잡이에 달려있었다. 어? 우리가 퍼스트 클래스/ 프라이어리티 승객이었나?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랜트카로 가는 셔틀이 바로 있었다. 나는 보통 대도시에서는 랜트카를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숙사에 들어갈 세라의 샤핑을 위해 하루만 차를 빌리기로 예약을 해둔 것이다. 랜트카 회사는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나왔다. 예약한 차를 빌리려고 하니 15불만 더내면 풀사이즈 SUV를 빌려주겠다고 한다. 내가 예약한 차는 풀사이즈 세단으로 가방 5개를 싣고 게다가 샤핑까지 하면 좀 작지 않을까 우려하던 차였으니 주저 없이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직원이 가져온 차는 뉴욕 번호판을 단 산타페였다. 차가 좀 가볍고, 브레이크가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잘 들어서 살짝 밟아도 콱 서버리는 것 때문에 한동안 적응이 어려웠다.
GPS로 먼저 costco를 찾았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Costco, Target, Bed Bath and Beyond인데, Bed Bath는 이미 하와이에서 주문을 해놓아 Fenway 매장에서 찾기로 했다. 코스코는 로건 공항에서 5마일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공항에서 북쪽으로 달려가니 코스코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보이는데 진입로가 복잡해 여러 차례 놓치는 바람에 그 앞에서 두세 번 돌고 난 후에야 비로소 도착했다. 그런데 차들이 가득 있어야 할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하! 오늘은 토요일 아침, 코스코가 문을 열려면 15분이 남았다. 그럼 뭐 15분 기다리다 들어가지. 차를 세우고, 마음도 세우고, 잠시 여유를 갖기로 했다. 빈 주차장에 새들(무슨 새인지 잘 모르지만)이 줄 맞춰서 끼룩끼룩 대며 한참 걷더니 일제히 날아오른다. 날자마자 > 자 형의 분대가 형성된다. 아 저렇게 하늘에서 분대를 형성하려고 땅에서부터 줄을 맞췄구나. 그런 모양을 잠시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하나둘 코스코 문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잘 몰랐지만 사람들은 이미 코스코 문 열리기를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메모리폼 베개, 소형 마이크로웨이브, 콘택트랜즈 세척액, 샴푸, 린스... 소피와 세라는 이런 것들을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카트는 꽉 차가고, 주머니는 비어 간다. 아직도 뭔가 더 사려는 아쉬움이 남은 소피와 세라를 데리고 코스코에서 나왔다. 아까 들어올 때 보니 이곳에는 우리가 가려던 Target과 Bed Bath 가 다 있었다. 타깃으로 직행하기 전에 아침을 아직도 안 먹은 것이 생각나 음식점을 찾다가 마땅한 것이 없어 다시 코스코에 가서 피자를 먹었다. 이상하게 같은 코스코 피자인데 하와이에서보다 훨씬 맛이 없었다. 타깃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건너편에 있는 Bed Bath로 들어갔다. 원래는 주문해놓은 것들을 Fenway 매장에서 찾기로 했지만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매장을 찾느니 여기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직원에게 이미 주문한 것을 취소하고 대신 여기서 새로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직원은 Fenway 매장 직원과 통화한 후 취소를 확인해 주었다.
세라는 여전히 원하는 디자인의 침구세트를 찾지 못했다. 하와이에서부터 그랬었다. 다른 것은 모두 샀다. 나는 마음속으로 '왜 저렇게 침구세트 디자인에 목숨을 거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이 없을 땐 차선을 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소피는 세라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고를 때까지 몇 시간, 며칠, 아니 몇 년이고 따라다닐 듯한 기세였다. "어차피 여기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니 다른데 가보자"라고 했고, 우리는 다시 타깃 매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타깃에서 베딩 코너를 쓱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다. 매장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하나 시켜가지고. '음~ 물건이 다양하지 못하니 여기도 힘들겠군' 하는 생각으로. 밖에 세워둔 차가 은근히 걱정이 됐다. 뉴욕 번호판을 단 랜트카 안에는 큰 가방 3개, 작은 가방 2개, 맥북, 아이패드, 기타 코스코 등에서 방금 산 물건들이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잃어버리면 아주 곤란해지는 것들이 모두 차 속에 있었다. 나는 차나 지키자. 이것도 분담이다. 타깃 문 앞 벤치에 앉아 주차장 쪽 한 번 보고, 언제나 나오나 문쪽 한 번 보고 그렇게 기다리기로 했다.
옆에는 70대 정도의 백인 할아버지가 개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었고, 또 다른 벤치엔 타깃 매장에서 일하는 듯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잠시 후 소피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라가 베딩을 하나 골랐다고. 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로써 오늘 내로 보스턴 칼리지 쪽으로 갈 수 있게 됐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경이롭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다니 놀랍다. 8월의 어느 일요일, 햇살이 따스해지면서 상쾌한 바람이 살살 부는 오전 8시 45분. 하와이에서부터 보스턴까지 멀리 날아가 코스코 앞에서 차를 세워두고 매장이 열기를 기다리던 15분의 짧은 시간이 아직도 생각난다.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넓은 주차장에서 새들 여러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다가 푸드덕 거리며 힘차게 날아오르던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다. 이런 평범한 풍경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공간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하와이가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낯선 풍경 하나가 언제든 다시 꺼내서 곱씹어 볼 수 있는 있는 롱텀 메모리로 단단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