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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버몬트-뉴욕 여행 3

2020년에 돌아본 2013년 여행

by Blue Bird
267E154A5237C75108 시애틀-보스턴 항공 기내에서


지금부터 12시간의 항공여행을 막 떠나야 한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그 지루한 기내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문제. 기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유형을 보면 일단 수면이 대세인 것 같다. 그다음은 순위를 가리기 어렵지만 아이팻이나 게임기 등으로 게임하기와 항공사가 제공하는 유료 영화 보기가 많이 눈에 띈다. 그밖에 책 읽는 사람, 뭔가를 읽다가 가끔씩 옆사람과 수다 떨며 다른 사람의 수면을 방해하는 사람, 와인, 맥주, 과자, 양주... 끊임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


나는 일단 시간 보내기로 아이패드와 킨들을 준비했다. 아이패드는 혹시나 기내에서 무료 WiFi를 제공할 경우 NetFlix를 통해 영화를 감상할 계획이었고, 그래도 시간이 무료하다면 킨들로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패드나 킨들 둘 다 별로 사용하지 못했다. 게임 조금 하다, 책 조금 읽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려던 계획은 항공사가 유료로 제공하는 WiFi로는 Netflix 영화를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사람 좌석 뒤에 달린 화면으로 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한 편당 거의 8달러를 내고 그 조그만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킨들을 켜고 책을 좀 읽었다. 그런데 윙~ 거리는 항공기 소음에 머리가 띵~ 해져서 오래 읽을 수가 없었다. 킨들에 저장된 책이 차라리 한국소설이었으면 한 권쯤 독파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좀 더 신경을 써야 읽히는 영어책뿐이라 오래 읽으니 머리가 아팠다. 읽으려 했던 책이 옛날에 그렇게도 재미있게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임에도 그랬다. 차라리 아이팟을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피가 게임하다 잠자는 틈을 타 아이패드로 카드게임을 했고, 여러 차례 성공했다. 여러 번 성공했다고 나중에 세라에게 말하자 세라는 세팅을 아주 어렵게 고쳐주었다. 아~ 눈물 나게 고마워라.


소피는 주로 잠을 자거나 눈뜨면 다이아몬드 맞추는 아이패드 게임을 했다. 세라는 오랫동안 창밖을 내려다보거나 책을 읽었다. 세라는 수개월 전부터 보스턴 가는 기내에서 읽을 책이라며 고이 모셔둔 여러 권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지만 그리 오래 읽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영어권인 세라도 기내에서 영어책을 보면 머리가 아픈 걸까? 아니면 책 내용이 무거웠을까? 신기한 것은 집에서는 틈만 나면 게임을 하던 아이인데 기내에서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하와이를 떠나 멀리 대학으로 진학하는 세라, 앞으로 4년 또는 그 이상 보스턴에서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조심스레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년 전, 세라가 10학년이었을 적에 대학을 살펴보려고 동부에 간 적이 있었다. 프린스턴, 콜롬비아, 하바드, MIT 등 명문대학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세라가 이런 학교에 진학하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세라는 대학을 본 것이 아니라 도시를 본 것이 확실하다. 그때의 여행 이후 세라의 마음속에는 대학생활은 보스턴에서 하겠다는 생각이 싹튼 것이다. 언젠가 "왜 보스턴이냐"라고 묻자 세라는 "보스턴의 오래된 빨간 벽돌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성처럼 아름다운 건물과 하바드 스퀘어의 책방이 마음에 들었는데...


항공기는 중간 기착지인 시애틀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서 1시간 30분을 기다린 뒤, 다시 알래스카항공 시애틀발 보스턴행 항공기로 갈아탔다. 시애틀 공항에서는 허리 한 번 펴고, 이메일 체크하고, 화장실 갔다 온 것 이외에는 별로 한 일 없다. Layover 시간이 1시간 30분이라 해도 타고 왔던 비행기에서 빠져나와 타고 갈 비행기 게이트까지 가야 하고, 출발보다 30분 전에 탑승해야 하니 남는 시간이 별로 없다. 갈아탈 항공기로 탑승하기 바로 전, 세라와 공항 내 상점들을 구경하고 있는 터에 소피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래스카항공이 기내 짐칸이 부족해 기내로 들고 들어가는 가방을 무료로 화물칸에 넣어주겠다는 방송이 나왔다는 것이다. 짐을 세 개나 부치면서 60달러를 추가로 낸 우리는 작은 가방 두 개는 좀 무거워도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특별히 가지고 다녀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나는 이참에 부치기로 했다. 가방 하나가 주니 몸도 가뿐했다. 그러고 보면 소피는 이렇게 방송에서 나오는 안내를 잘 듣는 편이다. 이번에는 세라와 나는 탑승 대기소에서 떨어져 못 들었지만, 만약 내가 방송이 나오는 곳에 있었어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한 50%쯤 있었을 것이다. 세라는 영어권이니 잘 듣기는 하는데 지금까지는 상황 파악 능력이 부족했었다. 즉 방송을 들었다 해도 우리에게 적용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다. 세라에 대한 나의 이러한 판단은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이다. 세라는 이제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가끔 아이들이 왜 이렇게 어리숙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나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발휘하는 재빠른 머리 회전 또는 약삭빠름을 목격하노라면 하와이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금만 더 요령 있게 또는 약삭빠르게 (사실 나는 같은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데도 단어에 따라 느껴지는 어감이 참으로 틀리다) 행동하면 손해 보는 일이 적을 텐데. 또는 이익을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 나만 이런 느낌을 갖는 걸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열심인 것을 볼 때면 요령 있는 것 (또는 약삼빠름)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하는 이곳 아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남을 돕는 봉사활동이 정말로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같은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대학에 가기 위한 스펙 쌓기의 전략으로서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한국 아이들도 대학 가기 위한 스펙 쌓기로 할 수도 있고, 한국의 한국 아이들도 순수한 봉사활동이 좋아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예로 봉사활동의 경우를 들었지만, 나는 가끔 세라를 보면서 조금만 더 약삭빠르게 행동하면 손해 보는 일이 적을 텐테... 하는 생각과 그렇게 손해를 안 보는 것보다 남을 위해, 그리고 단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당장의 이익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번갈아 하곤 했었다.


내가 아이패드로 게임을 두 번이나 성공시키는 사이, 항공기는 어느새 동부로 접근하고 있었다. 기내에서는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도착하려면 아직 30분도 더 남았는데 나왔고, 밖에서는 동이 트고 있었다. 도착시간은 8월 24일 오전 7시 30분. 밤새워 윙윙거리는 항공기에서 잠을 설친 사람들은 바야흐로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얼굴과 머리를 매만지고, 어질러놨던 주변을 정리하기도 했다. 참 멀다 보스턴, 이제야 다 왔다.




2013년만 해도 하와이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직항이 없었다. 직항은 2019년 4월에 비로소 생겼다. 그래서 그때는 보스턴에 가려면 보통 미서부 쪽 LA나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갈아타거나 뉴욕으로 가서 갈아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와이에서 뉴욕까지는 직항이 있으니 뉴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후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앰트랙이나 장거리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육로는 4시간 이상 걸리니 장거리 버스는 불편하고 앰트랙은 항공기보다 훨씬 편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많아 느긋한 여행을 할 경우에만 좋을 듯하다.


호놀룰루-보스턴 직항은 미국 내 최장거리 노선이다. 직행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한 수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뉴욕 이외에 보스턴 지역에서 하와이에 오는 관광객 수요가 증가한 것일까? 호놀룰루에서 보스턴까지 직항이 당시에는 11시간 40분이 걸렸는데 오늘 찾아보니 9시간 30분 걸린다고 나와있다. 어떻게 2시간 10분이나 빨라진 것일까 새로운 항공로가 생긴 건가? 참고로 인천에서 보스턴까지는 직항이 13시간 4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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