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본 2013년 여행
"여행을 하는 것은 설렘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은 누가 한 말이 아니고 지금 내가 한 말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다. 여행을 앞두고 가려는 곳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그곳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 여행은 어느 정도 목적이 있는 여행과 순수한 여행이 섞인 것이다. 세라를 대학에 데려다주는 것과 그 이후의 일정이다. 2년 전 보스턴에 가본 적이 있어서 설렘 면에서 보스턴은 아주 약하다. 물론 보스턴을 3~4일 둘러봤다 해서 보스턴을 다 안다고 말하는 용감한 여행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단지 한 번 가본 곳이기에 기대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는 버몬트에 쏠려있다. 버몬트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몬트를 둘러보면서 뉴햄프셔, 메인주, 가능하면 캐나다의 몬트리올까지 가볼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크다. 모두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다. 오리엔테이션 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위쪽으로 올라가는 일정을 두리뭉실하게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두리뭉실... 일부러 그랬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소피는 기내에서 먹을 김밥을 쌌다. 요즘 항공사들이 기내식, 배기지 등에 붙이는 수수료 등으로 부수입 올리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하지만 기내식이 우리 입맛에는 별로이고 품질 대비 비싸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맛있는 홈메이드 김밥을 가져가기로 했다. 싸고 남은 것으로 아침을 먹고, 문단속, 물 단속, 불단 속, 차단속, 플랜트 단속... 뭐 이렇게 챙길게 많은지. 그리고 한인 택시를 불렀다. 짐이 많다고 미리 말했더니 미니밴이 왔다. 아줌마 기사였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호놀룰루를 오후 1시 10분에 출발하는 알래스카항공이다. 11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하니 세라의 친구가 한 명 나와 있었다. 세라와는 3살 때부터 친구인 티파니다. 세라가 타파니와 이별의 시간을 갖는 동안 짐을 부쳤다. 신발을 벗고, 허리띠를 풀고, 두 손 다 들어 절대 항복을 표시한 후 검색대를 통과했다. 그런데 검색관이 우리가 항공기 안으로 들고 가는 작은 가방에 문제가 있다며 가방수색을 시작했다. 채 허리띠도 매지 못한 채 우리 가방 속을 마음대로 휘젓는 검사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검사관은 가방에서 우리가 비상시 먹으려고 구입한 볶음 고추장과 새로 산 헤어젤을 능숙하게 꺼냈다. 그리고는 가방을 다시 검색대로 보내 모니터로 살피더니 통과시켰다. 적발해낸 고추장과 헤어젤은 압수했다.
그 정도 크기는 가능한 줄 알았는데... 도대체 고추장과 헤어젤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검사관이 자기는 농무부 소속 이라며 가방에 들은 방울토마토는 자기가 가져가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기내에서 김밥하고 같이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이건 또 왜 가져가는지. 씨 있는 농산물을 하와이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안되지만 기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니, "무조건 안된다"라고 한다. 그래 방물 토마토 잘 드셔라고 속으로 말하며 돌아섰다. 돌아서며 얼핏 농무부 검사관을 슬쩍 보니 살이 좀 올라있는 체격이었다. "에이 과일 또는 야채 먹는다고 저렇게 살이 찔까...?" 애써 연관성을 부인하며, "농무부 검사관은 압수한 농산물을 절대 자기가 먹지 않을 거"란 믿음으로 일관하며 공항으로 들어갔다. 한편으론 "압수당했으니 버려지는 것보다 차라리 누군가 먹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항공기 탑승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있다.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차츰 우리를 변하게 만든다. 7년 전만 해도 비행기를 타러 갈 때 김밥을 싸간 것이 그 하나다. 지금은 비행기 타서 간단하게 사 먹지 뭐하러 김밥까지 싸가지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내에서 사 먹는 것보다 집에서 싸간 김밥이 맛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밥을 싸려면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라고 말하면 재미에 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 갈 때 소피에게 김밥 싸가자고 말하면 엄청 싫어할 것 같다. 싫어할까? 다음에 여행 갈 때 한 번 모르는 척하고 말해봐야겠다.
또 달라지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다. 이건 우리 얘기가 아니고 세라의 이야기다. 그때는 티파니가 세라의 절친이었고 공항까지 나왔지만, 이제는 세라와 타파니는 서로 연락이 끊긴 듯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렇게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듯하다. 관계를 끊어야지 마음먹고 일부러 끊은 것은 아닌데 서로 연락이 뜸해지고 얼굴 보는 것도 뜸해지면서 사람 간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와 반대인 듯하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내 남은 삶에 대한 관심은 더해진다.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