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묵었던 B&B근방에 있는 어떤 집. 뉴튼. 혹시 여기서 일곱난장이가 불쑥 나오지 않을까?
오늘이 벌써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이다. 겨우 3일뿐이지만 이것도 피교육자 입장이라 피곤하다. 한 번은 맨 앞줄, 의자에 등을 쭉 빼고 앉아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세라에게 중요한 거니까 부모도 잘 알아두어야 해.. 그렇게 졸음을 참으려 했지만 졸음 앞에서는 당할 재간이 없다. 소피라도 잘 들어야 하는데.. 소피를 가끔 체크한다. 소피도 졸리긴 마찬가진가 보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왔다. 빼먹은 프로그램 하나도 없이. 오늘은 학부모들도 단과대별로 나뉘어 진행됐다. 우리는 가장 많은 학생이 속하는 College of Art and Science에 속했다. 담당 교수진, 교직원의 설명을 듣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는 그동안 헤어졌던 세라를 만났다. 점심식사와 함께 종료식을 겸하는 자리다. 옆쪽에는 학교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각 부서와 밴더들이 컨벤션을 하듯 부스를 차려놓고 학생과 부모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우리는 세라의 은행계좌 오픈을 위해 Bank of America 부스에 들렀다. 계좌 오픈을 위해서다. 학교에서 가까운 뉴튼 지점이 오늘은 특별히 늦게까지 오픈한다는 정보를 듣고서 나왔다.
오리엔테이션 행사는 오후 3시쯤 모두 끝났다. 캠퍼스 내 서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산 후 세라의 기숙사로 향했다. 세라의 룸메이트는 어릴 적에 동부로 유학 온 한국 학생인데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에 잠깐만 볼 수 있었다. 뉴햄프셔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아직도 그곳에 동생이 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지금도 기숙사로 들어오지 않고 그곳으로 간 모양이다. 하긴 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라니 왕래가 어렵지도 않을 듯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다. 소피가 다니는 병원 박사님의 둘도 없는 친구의 딸 내외가 보스턴에 살고 있는데 박사님의 소개로 이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름은 J이며 보스턴칼리지 로스쿨을 나왔다. 현재 변호사이고 남편도 같은 학교 출신이며 변호사다. J는 약속한 대로 학교 내 성당 앞으로 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보스턴 시내 쪽 그들이 안내한 한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J는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아주 어릴 때 미국에 온 한인 2세다. 영어가 편하고 한국말이 어눌한, 그러니까 소피나 나와 같은 1세보다는 한 살 때 온 세라와 통하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학부는 다트머스를 나왔으니 소싯적 공부도 꽤나 잘했을 것이다. J의 남편은 한국계가 아닌 미국인이다. 그런데 한식당에서 먹는 걸 보면 거의 한국사람 수준이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게 마련인가 보다. 와이프에게 밥을 얻어먹으려면 한식이든 양식이든 해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와이프가 같은 한식 식성이면 재수가 좋은 거다. 양식 식성이면 남자도 식성을 바꿔야 굶어 죽지 않는다. 그게 싫으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직접 요리를 하는 것. J의 딸은 세라보다 한 살 위로 지금 UCLA에 다닌다고 했다. 이것도 묘한 인연이다. 세라는 보스턴칼리지와 UCLA 중에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보스턴을 택했다. 그러니까 동부에 사는 J의 딸은 서부에서, 서부에서 가까운 하와이에 사는 세라는 동부에서의 대학생활을 선택한 것이다. 역시 아이들은 집에서 가장 먼 곳을 동경하는 모양이다. 이들을 만나며 다시금 사람 사이의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소피가 일하는 병원의 박사님과 J의 아버님. 이들은 그 옛날 한국에서 지금의 연세대 전신인 학교에서 의학공부를 함께 시작해 지금까지 그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오래오래 서로 연락하며 터놓고 지낼만한 친구 하나 두는 것,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80세가 넘어서도,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도 "밥 먹었어?" 하며 스스럼없이 전화하는 친구 하나 있다는 건 축복이다.
J가 뉴튼에 있는 Bank of America에 데려다줬다. 계좌 하나 오픈하는 거니까 잠깐이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은행 안에는 보스턴칼리지 신입생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유학생, 중국계와 한국계 학생들이다. 다들 학생들이 친구들과 왔는데 우리만 학부모 동행이다. 우리가 너무 과보호 학부모인가? 세라 혼자 왔어도 잘할 수 있었겠지... 중국인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짱이 보통이 아니다. 그 먼길을 아이들 혼자 보낸다. 외국으로 유학 가는데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아이도 혼자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비가 비싸서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도 참 씩씩하게 다닌다. 한 시간 넘게 걸려서 계좌를 오픈하니 이미 깜깜해졌다. 우리가 있는 B&B는 걸어갈 정도로 바로 앞이지만 보스턴칼리지 기숙사까지는 걷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데려다 준후 돌아오려고 택시를 탔는데 한 여학생이 앉아 있다. 보스턴칼리지 신입생인 중국 여학생이다. 택시 불러 타고 기숙사에 가는 중이다. 혼자서. 운전기사는 아랍계 억양이 있는 아저씨다. 대단한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잘 모르는 건지, 할 수 없는 건지...
아이를 데려다주고 B&B로 돌아왔다. 이제 오리엔테이션은 끝났다. 세라는 내일부터 밴드 캠프에 참가하고 우리는 내일 아침에 버몬트로 떠난다. 이제 짐이 가뿐하니 로건 공항까지 트레인으로 갈 수 있다. 거기서 차를 랜트하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내일 숙소는 방금 전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이곳저곳을 검색하다 Stowe라는 스키리조트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여름에 스키리조트에서 뭘 할까? 그곳은 어떤 곳일까? 인터넷으로는 세계 어디든지 가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내 발로 가보기 전에는 느낌이 없다. 그 느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가는 거다. 이제 내일부터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대학 신입생 기숙사 룸메이트로 누구를 만나느냐가 대학생의 첫해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것 같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던 타인과 같은 방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먹는 습관, 자는 습관, 청결도, 기타 친구관계 등 많은 것들이 서로 잘 맞지 않으면 끔찍해질 수도 있다. 잘 맞는다는 것은 꼭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상식을 상대가 상식으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면 큰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라의 룸메이트는 부모님은 한국에 있고 아이들만 미국 동부로 조기유학을 보낸 케이스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유학 와서인지 주로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세라는 1살 때 나와 함께 하와이로 와서 계속 자라면서 한국 친구들이 거의 없다. 말하자면 한국계 이민 2세인 것이다. 한국 문화는 나와 소피의 생활방식에서 체험한 것이 전부다. 나는 세라가 한국 학생과 룸메이트를 하면서 그 또래의 한국문화를 배우며 잘 지내기를 바랬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룸메이트와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서로 간의 다름을 1년 이내에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룸메이트 한국 학생은 여전히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렸다. 다행히도 세라는 하와이에서 함께 보스턴 칼리지로 진학한 한 일본계 여학생과 어울리며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 일본계 여학생이 없었더라면 세라는 대학생활을 매우 어렵게 시작했을 것 같다. 물론 그 일본계 여학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