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본 2013년 여행
이번 여행의 목적 중 절반은 완수했다. 나머지 절반은 덤으로 얻은 거다. 세라를 학교에 잘 안착시켰놓았으니 이제 자유여행을 떠나는 거다. 사실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이 덤이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다. 방향만 북쪽으로 정해놓았을 뿐. 호텔은 최소한 전날 밤에 예약할 생각이니 방향은 어디에 호텔을 잡았느냐에 따라 행선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보통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따라 호텔이 정해지지만 꼭 그래야 하는 규칙이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는 것도 재미있다. 정확히 말하면 주객을 전도시키는 것도 재미있다.
어젯밤늦게 B&B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곳은 Stowe다. 버몬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부터 그곳으로 가는 거다. 이게 얼마나 신나는 순간인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곳에 첫발을 디딜 때 내 오감은 긴장한다. 스릴을 느낀다. 곤두선 감각이 처음 접하는 것을 탐색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을 접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신기한 것처럼. 이것이 여행을 하는 이유다.
조그만 여행가방을 하나씩 끌고 B&B를 나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트레인을 타고 로건 공항으로 향했다. 뉴튼 역은 옛날 한국의 기차역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도 서울 근방이 아니라 충청도쯤에 있는 작은 마을의 기차역 같다. 여기서 공항으로 가는 기차도 달랑 두 칸짜리다. 혼잡한 보스턴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인데 이렇게 풍경이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다.
공항에서 랜트카 셔틀로 갈아타고 맨 마지막 스탑인 알라모에서 내렸다. 이젠 로건 공항도 익숙하다. 한번 와본 곳이라고 알라모 차 빌리는 곳도 익숙하다. 차는 그냥 풀사이즈 세단으로 예약했다. 이제는 짐도 별로 없고 사람도 소피랑 나 둘 뿐이니 큰 차가 필요 없다. 그런데 직원은 조금만 더내면 SUV로 업그레이드해준다고 유혹한다. 하루에 15불 차이다. 4일 빌릴 거니까 60불 더내면 된다. 우리 차도 미니밴이라 평소에 세단을 잘 운전하지 않는 나는 어쩔까 잠시 망설였다. 60불 더내고 공간을 택할까, 그거 아껴서 식사 한 두끼에 보탤까. SUV가 세단보다 개스도 더 많이 들 텐데... 등의 생각이 5초간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다 결국 SUV를 택하기로 했다. 오래 운전할 거니까 큰 차가 편하지... 하는 자기 합리화가 금세 이루어졌다. 직원이 이번에 가져온 차는 검은색 Toyata Highlander. 차가 좀 큰 거 아닌가.. 하다가 일단 타봤다.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특히 차가 묵직해서 나중에 도로를 장시간 달리며 여러 번 잘한 선택이라고 느꼈다. 나는 묵직한 차가 안정감이 있어 좋다. 짐은 가벼운 것이 좋지만.
GPS를 Stowe로 맞췄다. 북쪽으로 달렸다. 묵직하게. GPS가 이끄는 대로 달리다 보니 내가 갈 곳은 버몬트인데 가는 길은 뉴햄프셔다. 하이웨이는 별다른 독특함이 없지만 도로 좌우로 계속되는 나무, 이 나무들과 이어지는 멀리 숲이 참 넓고 크다. 아 지금 푸른 저 나무들이 두 달 후에는 단풍으로 물들겠구나 생각하니 억울했다. 억울해 해봤자 소용없다. 차라리 색맹이 되는 게 낫다. 푸른 나무를 빨간 단풍으로 바꿔서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 저 곱게 든 단풍, 참 아름답기도 하여라.
가는 길에 여행책자에서 봤던 Quechee가 나와서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때운 후 주변을 둘러봤다. 한국의 유원지 같은 분위기가 났다. 계곡이 멋지긴 한데 계곡이 쫙 내려다 보이는 적당한 장소를 찾기 어렵다. 한 시간쯤 숲 속을 걷다 다시 길을 떠나려 차로 왔다. 그리고 차로 조금 가려니 다리 위 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제일이었다. 이런 장소를 찾으려고 한 시간을 숲 속에서 걸었는데 숲을 빠져나와 차로 가다 보니 그런 장소가 나오다니. GPS는 우리를 계속 북쪽으로 이끌었고 그대로 가다 보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고도가 높은 곳으로 올라온 듯한 느낌... 그리고 산 쪽으로 쭉 올라가며 형성된 아주 예쁘장한 마을이 나타났다. Stowe다.
처음 가는 곳을 가보는 느낌, 나는 이런 낯섦을 세상 무엇보다 즐긴다. 이런 느낌이 나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꼼짝을 못 했다. 내가 살고 있는 하와이 내에서 안 가본 곳을 구석구석 찾아봤다. 하지만 여기서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난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일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럴 때 장기여행을 가면 좋은데... 하는 아까운 생각만 든다.
이런 상황이 완전히 풀리면 장기여행을 어떻게 갈 수 있을지 생각 중이다. 그런데 코로나가 풀리면 다시 일해야 하는데 장기여행을 갈 수는 있을까?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은퇴를 65세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럼 은퇴하고 나서야 가능하단 말인가. 과연 그때 세계여행을 할 수 있을 만한 건강이 허락할까? 차라리 일단 일을 그만둔 후 먼저 장기여행을 다녀온 후에 다시 일하는 방법은 어떨까? 그보단 계속 일하면서 일 년에 한 달 정도씩 여행 가는 스케줄에 제일 좋을 것 같은데, 회사에서 주는 휴가가 한 번에 2주일밖에 안되니. 여행을 위해 직업을 바꿔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