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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버몬트-뉴욕 여행 12

2020년에 돌아본 2013년 여행

by Blue Bird
256AAB505254826C1A 음악회가 열린 Trapp Family Lodge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차가 많이 막혔다. 미국 국경을 넘어 교통량이 뜸해지자 속력을 냈다. 밤이 늦어버리면 스토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깜깜할 때 가야 하기 때문이다. 제한속도에서 10마일 이상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에 차가 있으면 추월차선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주행 차선으로 돌아간다. 주행 차선으로 달리다 보면 얼마 안 가 늦게 달리는 차를 만나게 되고 다시 추월차선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떨 땐 추월차선으로 계속 달려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주행 차선 차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왔다 갔다 하느니 추월차선으로 쭉 달리다가 주행 차선의 맨 앞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어느새 또 다른 차가 추월차선에서 주행 차선을 달리는 내 앞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을 많이 단축했다. 그 덕분에 버몬트 스토에 도착한 건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스토에서는 해가 이제 막 하루 일을 끝내고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아예 저녁을 먹고 가려고 마을에 차를 세웠다. 마을에서는 해가 지는 시간인데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비틀 같은 차를 개조해 그릴을 만들고 립(rib)을 파는 곳에서 저녁거리를 샀다. 립에 어울리는 맥주도 인근 슈퍼마켓에서 샀다. 콜로라도 브랜드다. 처음 보는 맥주다.


리조트로 돌아와서는 우리 룸 바로 앞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처럼 야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각 룸마다 작은 야외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참 편리하다. 립은 토니 로마스 립보다 훨씬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립 중에서 최고였다. 콜로라도 맥주도 새로운 맛이었다. 괜찮았다. 립을 먹으며 소피는 첫날 리조트 게시판에서 본 작은 음악회에 가보자고 했다. 음악회는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한 10분 정도 위쪽에 위치한 Trapp Family Lodge에서 열린다. 이 랏지는 스토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듯하다. 차를 세우고 음악회가 열리는 곳을 찾았다. 랏지는 높은 빌딩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3~4층 정도의 낮은 건물이 언덕 위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음악회가 열리는 곳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곳저곳의 문을 통과하고 긴 복도를 이리저리 지나니 마침내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거리며 그쪽으로 향했다.


한 150명~ 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룸이었다. 앞쪽에는 20여 명 정도가 악보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청중이 꽉 차 있었다. 모두가 백인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백인이 이렇게 한 곳에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부르는 노래는 올드팝이다. 앉을 곳이 없어서 우리는 뒤쪽에 가면히 서있었다. 화음이 뛰어났다. 오랫동안 연습을 해온 실력이다. 그렇게 서서 몇 곡을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백인들만 모인 음악회를 신기해하며 구경하듯, 이들은 아시안 두 명이 살며시 들어와 구경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지 않을까? 백인들은 드러내 놓고 사람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안보는 척하면서 살짝 본다. 우리는 그 살짝 보는 것을 짐짓 모르는 척. 뒤쪽에 있는 테라스에서 밖을 보니 산 아래 경치가 멋지다. 해는 이미 졌지만 아직 깜깜한 정도는 아니다. 내가 하와이에 있었더라면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까? 이 시간 여기서는 이런 음악회가 열리고 있구나. 이 세상 다른 곳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스토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랏지 창가로 비치는 불빛은 어느 외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그래, 이곳은 아주 먼 곳이다. 같은 미국 땅이지만 하와이의 호놀룰루와 버몬트의 스토... 분위기가 전혀 다르고 아주 먼 곳이다.


내일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 메인 쪽으로 갈까, 벌링턴 쪽으로 갈까. 메인으로 가면 벌링턴을 놓치고 벌링턴으로 가면 메인을 놓친다. 그게 선택이란 거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하면서 산다. 때로는 작은 선택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학창 시절 암송하고 다녔던 '가지 않은 길'의 로버트 프로스트가 여기 버몬트에서 살았다. 프로스트가 살았던 버몬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인다. 가지 않을 길을 궁금해한다. 지금 메인 쪽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는 메인을 방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메인은 아주 춥고 외진 곳이다. 여름이 아니면 방문이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벌링턴 쪽으로 선택했다. 아직 버몬트도 잘 모르고 버몬트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벌링턴에도 안 가봤다. 모레는 보스턴으로 가서 차를 반납하고 뉴욕으로 가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보스턴 쪽으로 많이 내려갈 생각이다. 그래서 숙소를 브래틀보로(Brattleboro)로 잡았다.


스토에서 나오는 길에 유명한 벤 앤 제리(Ben & Jerry's) 아이스크림공장에 들렀다. 개장시간이 9시인데 10분 전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고 이곳에 왔으면 딱인데 배고픈 상태에서 아이스크림 공장에 먼저 와버렸다. 아이스크림으로 아침을 때우는 것은 어떨까? 개장하자마자 첫 번째 투어 그룹으로 공장 내부를 구경했다. 인근에 초원이 많으니 젖소가 많고, 젖소가 많으니 이런 아이스크림 비즈니스가 생겼다. 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우유로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까?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았다는 맛의 아이스크림을 시식해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나왔다.


벌링턴은 생각보다 멋진 곳이었다. University of Vermont 건물들은 고생 창연 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여기도 이제 막 학기를 시작했는지 캠퍼스 곳곳에서 학생들이 활보하며 활기를 띠고 있다. 우리는 GPS를 한식 겸 일식당에 맞추고 이끄는 대로 갔다. 그런데 GPS가 다 왔다고 주장하는 다운타운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으려는 식당이 안 보인다. 한참 헤매다가 GPS가 오래전에 산 것임을 깨닫는다. 내 추론은 식당 같은 곳은 비즈니스가 잘 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쉽사리 바뀔 수 있다는 것. GPS는 이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지금 GPS가 가리키는 곳에는 내가 찾는 한식/일식당이 아니라 다른 미국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를 도로 주차장에 세우고 처치 스트릿을 걸었다. 처치 스트릿은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다. 정면에는 교회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정오가 다되어 한 미국 식당에 들어갔다. 햄버거 스테이크, 샌드위치, 프랜치 프라이.. 이런 것들을 시켰다. 식당 앞쪽은 시청 건물이 있었고 그 뒤뜰에서는 거리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겨울이 길고 아주 추운 곳이니 이런 행사는 요즘이 한창일 것이다. 첼로와 기타 연주를 들으며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딘가 자리 잡고 앉아 이제 막 시작한 음악회를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다. 숙소로 예약해둔 브래틀 보로로 가려면 아직도 먼 길이다.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버몬트와 뉴햄프셔 지역을 차로 운전하며 다니다 보면 목가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푸른 초원에 소들,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농가 주택들이 띄엄띄엄 있다.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에 눈이 덮여 있겠지만 여름에는 날씨도 화창하고 공기도 쾌적하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보이는 풍경은 목가적이지만 그 농가주택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엄청 무료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내가 농촌생활을 잘 몰라서 그렇지 가축을 돌보거나 작물을 재배하느라 무료할 틈이 전혀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전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가끔, 더 나이가 들면 이렇게 전원에서 사는 건 어떻까 생각해 본다. 평생을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살던 나 같은 사람들이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잠시 스쳐가며 보기에는 전원생활이 좋아 보이긴하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 보면 새로운 자극이 전혀 없기에 무척 심심할 것 같다. 아직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버몬트의 교외지역과 뉴욕시 중에서 어디서 살고 싶으냐를 선택하라면 그래도 뉴욕시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삶이 빡빡하고, 사람들이 너무 많고, 도시인의 냉정함을 싫어하지만 농촌에서 사느니 그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시 또는 도시 근방에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게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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