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보는 2008년 여행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여기서 살면 어떻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연이 아름답거나 도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을 경우에 그렇다. 하지만 사는 지역을 옮긴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현재 살고 있는 익숙해진 지역에서 떠나는 문제는 나로서는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게 사는 재미를 더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렵게 하는 건 직장이다. 같은 회사의 다른 지점으로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도 어렵다. 특히 전문직 기술을 가지지 않은 이민자가 미국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크지 않다. 아니 매우 한정적이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짧게나마 경험하게 되는 도시들에서 살고 싶어 지는 경우에는 당장 이주하겠다는 마음보다는 늘 언젠가 은퇴해서 살아보고 싶은 후보지역으로 점찍는 수준에서 기억되곤 한다. 2008년 여름에 다녀온 워싱턴주와 오레곤주도 은퇴 후 살아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워싱턴주와 오레곤주 여행을 다녀왔다. 9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서인지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은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준비과정에서 곡절이 많았다. 첫 번째 세라와의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하나뿐인 딸을 여행에 데려가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는 여행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당초에는 아이가 LA에서 섬머스쿨을 하러 갈 때 데리고 가거나, 끝나고 올 때 데리고 여행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공 스케줄과 소피의 휴가, 내 휴가를 맞추기 어려웠다. 휴가를 내면서도 업무상의 공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그러다 올해는 특히 여행 없이 연말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코에 신선한 바람이 필요했다.
아이는 그냥 섬머스쿨에 보내고, 그 사이에 소피와 내 스케줄을 맞춰 둘이서만 오붓하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은 많이 했지만 둘만의 여행은 결혼 13년이 넘어서 처음이다. 소피도 이번 여행지에서는 엄마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기회다. 물론 여행지에서도 전화로 매일 세라와 통화를 하면서 어쩌고 저쩌고 수다를 떨긴 했지만...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다.
두 번째 문제는 떠나기 3일 전 소피가 핸드백을 도난당한 것이었다. 사무실에 놔둔 핸드백을 누가 들어와 훔쳐갔다. 가방에 들어있던 현금은 얼마 되지 않지만 신용카드와 ID, 집 키, 차 키 모두 없어진 것이 문제였다. 즉시 신용카드회사에 전화로 카드 취소하고, 집과 차의 열쇠를 바꿨다. ID는 다음날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이런 상태에서 여행을 떠나야 하나?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 가는 것이 낫다 싶었다. 없어진 건 없어진 것, 여행은 여행이다. 만약 떠나는 날 도둑을 맞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7월 3일 밤 10시 50분, 노스웨스트항공 밤 비행기를 탔다. 일정은 호놀룰루-포틀랜드(오레곤)-야키마(워싱턴)-시애틀-타코마-올림피아-101번 퍼시픽 하이웨이로 오레곤 동남부 끝까지 (또는 캘리포니아 동북쪽 끝까지-유진-샐럼-포틀랜드-호놀룰루다. 상당히 먼 거리를 운전해야 하는 일정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포틀랜드나 시애틀 한 두 곳에 머무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미 서부를 여행할 때는 차를 빌려서 운전하며 다니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한 도시에만 머문다면 굳이 차를 빌릴 필요가 없다. 그냥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 되고, 시내에는 대중교통이 대체로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리를 잘 모르는 시내에서는 차를 운전하는 것이 어렵고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몇 개의 도시를 간다면 도시 간 이동시에 랜트카는 필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가족 여행이라면 더욱 그렇다.
랜트카를 할 때 랜트카 회사에서 요구하는 보험에 보험에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다. 풀 보험을 들면 랜트카 비용이 거의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온 경우라면 보험을 드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차의 보험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신용카드 회사에서 보험을 자동적으로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보험약관이 복잡해서 어떤 것은 자기 차로 커버가 되고 어떤 것은 커버가 안되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경우가 많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고가 안 나서 보험을 사용할 일이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에 보험을 사용할 일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는 내차 보험으로 대체했고, 외국 여행 시에는 풀 보험을 들었다. 풀 보험으로 들면 가격은 비싸지만 마음은 편하고, 내 보험으로 하면 가격은 싸지지만 차를 반납할 때까지 조금 불안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심리를 이용하는 게 보험 비즈니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