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되돌아보는 2004년 여행
익스플로라토리엄은 안에도 볼 것이 많았지만 밖이 더 멋있었다. 호수에 백조가 떠다니고 비둘기가 날아다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한가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장소를 우연히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좀 더 오래 머물고 싶다. 갈 곳이 많아도, 여행 일정이 아무리 빡빡해도 내가 마음에 드는 곳은 그냥 스쳐 지나면 아쉽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올지도, 영영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곳, 그냥 스치고 지나가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그곳에서 좀 오래 머물렀다. 새를 보면서, 물을 보면서, 능수버들처럼 가지와 잎이 가늘게 흔들거리는 나무를 보면서.
갈 때 탔던 버스를 다시 타고 호텔 근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갈까 하다가 호텔에 먼저 들러서 샤워도 하고 좀 쉬다가 편하게 다시 나오기로 했다. 호텔에서 나와 좀 걷다 보니 유니온스퀘어가 나왔다. 광장을 둘러싸고 건물들이 빽빽한데 둘러보니 메이시 백화점, 보더스 서점, 티파니 보석점 등이 눈에 띄었다. 여행지에서 이미 알고 있는 상점들을 만나면 반갑고, 모르는 상점을 만나면 호기심이 발동한다. 저곳은 무엇을 파는 곳일까? 그중에서 한 곳, 주방용품 파는 곳에 들어가 꼼꼼히 구경했다. 신기한, 예술품에 가까운 주방용품도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비쌌다.
저녁은 유니온 스퀘어에서 멀지 않은 일식집에서 먹기로 했다. 항상 뭘 먹을까 생각하다 보면 한식이 1순위로 떠오르고, 그다음이 일식, 중식, 이런 식이다. 가끔은 스테이크나 햄버거, 샐러드 같은 것들도 먹고 싶지만 역시 한식을 먹고 나서의 만족감이 가장 크다. 일식은 양은 적고 반찬도 없지만 깨끗하고 먹고 나서 부담이 별로 없다. 중식은 먹을 땐 푸짐하고 맛있지만 먹고 나서는 기름기가 느껴진다.
소피는 덮밥, 세라와 나는 우동과 초밥 세트메뉴를 시켰고 아사히 맥주도 곁들였다. 저녁식사 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보더스는 하와이 보더스와 다른 점이 있나 확인차 잠시 들렀고, 호텔 바로 앞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보더스도 그렇고 스타벅스도 그렇고 하와이의 매장들과 별로 다르지는 않았지만 느낌만은 달랐다. 그 다른 느낌이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무척 어렵지만, '여유'라는 관점에서 달랐다고 말하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하와이의 보더스와 스타벅스 매장에는 여유라는 손님이 매장에 앉아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그곳에는 그 손님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상점 내의 빈 공간이나 빈자리, 점원들의 표정, 손님들의 움직임 등에서 나온다.
여유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혹여 개인적인 익숙함의 차이일수도 있다. 내가 자주 가기 때문에 이미 그 구조를 잘 아는 보더스나 스타벅스에서는 편안함을 느끼고, 처음이기 때문에 구조를 잘 모르는 샌프란시스코의 매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거나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건 아주 주관적인 생각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엔 7시에 일어났다. 하와이로 돌아가는 날이다. 수영을 하고 어제저녁에 먹다 싸가지고 온 돈부리와 초코파이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정오까지였지만 시간이 애매해 2시로 연장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날을 좀 더 효과적으로 쓰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MUNI를 타고 골든게이트 공원에 가려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도중에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는 동물원 돌아보기에도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동물원에 왔으니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동물원을 구경할 것이냐, 아니면 동물원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탈 것이냐?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다. 비행기를 타야지. 동물원에 들어가는 걸 포기하고 돌아서기로 했다. 그래도 동물원에서 가장 키가 큰 기린은 멀리서나마 봤다.
돌아오면서 동물원 근방의 비치를 잠깐 들렀는데 이건 하와이 비치에 비하면 비치도 아니다. 비치에 있어야 할 하얀 모래는 간 곳이 없고, 흙인지 진흙인지 모를 거무튀튀한 모래가 보기 흉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백사장이라고 몇몇 사람들이 선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와이를 꿈에 그리는구나.
돌아오는 길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스릴 있었다. 물론 지금 하는 말이니까 스릴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때는 진땀이 났었다. MUNI가 갑자기 서더니 꼼짝을 안 하는 거다.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고장 났으니 뒤차로 갈아타란다. 호텔 체크아웃해서 비행기 타려면 시간이....
다행히 뒤차가 빨리 도착했고 호텔에는 정확히 2시에 도착했다. 체크아웃은 했지만 아직 1시간 정도 시간이 있어 공항 가기 전에 호텔 근방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방은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 잠시 맡기고 호텔 앞 지중해식 식당에서 처음 먹어보는 지중해식 음식을 시켰다. 정통 지중해식 식당이라기보다는 지중해 음식을 패스트푸드 화해서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호텔에 들러 가방을 다시 찾아 공항으로 출발했다.
아쉽고 짧은 샌프란시스코 여행이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2004년은 영주권을 받은 해이다. 유학으로 시작된 미국 생활이 취업비자, 영주권, 시민권으로 발전됐다.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 생각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국 생활이 현실이 됐고,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지는 점도 미국에 남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미국 생활 20년이 넘은 지금은 운명이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 온 것도,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지금 여기 이렇게 살고 있게 된 것도. 가끔 한국에 그냥 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미국행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미국에 갔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잘해야 하겠지만, 일단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가지 않은 길은 어차피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