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 한 권 만들기는 단편 에세이 쓰기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예정보다 긴, 이 주 동안 주제를 생각하고 의도를 추리고 목차를 만들었다. 떠오르는 대로가 아니라 정해놓은 순서대로 글을 쓰는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취미로서의 글쓰기는 강제, 제약, 제한이 없다. 쓰고픈 마음이 피는 날은 홀린 듯 썼고, 인상적인 어떤 날은 불쑥 썼다. 떠올리고 가다듬는 과정도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취미로 쓰는 글은 읽어주면 고맙고, 아무도 안 읽어줘도 그다지 서럽지 않다. 써서 즐거우면 그뿐.
책을 쓰는 것은 취미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더니, 기왕 애써 쓰는 긴 글이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이 살살 커진다.
제법 긴 리스트의 목차를 만들고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이 세 번째 글이다. 글감이 정해져 있어서 편하다. 아직까진 그렇다. 목차를 만들 때 제목(가제라 발행 때 바뀌기도 한다) 옆에 쓸 내용을 간략히 메모해 뒀다. 쓸 때 보태거나 뺀다. 글감이 있는 상태니까 노트북을 열기 전까지 추가할 내용이 있는지 정도 생각하고 순서와 배치 궁리를 한다. 글제에 따라 생각하고 쓰는데 이틀 정도 걸린다.
우리는 유명 작가의 글쓰기 루틴을 많이 듣는다. 공통점은 운동을 하는 작가가 많다는 것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반드시 쓴다는 점이다. 일반인인 우리가 글쓰기를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매일 쓰라는 말이다. 목적조차 막연한 초보자가 매일 뭐라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개 에세이, 수필 몇 개 쓰고 나면 밑천이 떨어져 일기 쓰기로 흐르거나 포기하게 된다. 기성 작가들이 매일 일정하게 쓰는 건 어쩌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목표가 있어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매일 쓰기란 단지 글쓰기 습관을 들일 목적뿐이라서 지속하기가 어려운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신춘문예 도전이라던지 출판사와의 계약 같은 강제력이 있으면 월급을 위해 밤을 새워 일하듯 어떻게든 매일 쓰지 않을까.
목차라는 가이드가 있으니 쓰기는 좀 수월해진 것 같다. 노트북을 열 때의 부담이 조금 줄었다. 우선 글감을 낑낑거리며 생각해내는 수고가 줄었고 정해진 글제를 어떻게 잘 쓸까만 요리조리 생각하면 된다. 쓰는 데 들이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내가 작가 같다는 느낌은 든다. 기대했던 바다. 이 책을 쓰는 동안은 작가처럼 몇 달을 살아보는 것을 기대했다. 내가 작성을 했어도 목차라는 써야 할 일정이 생겼고, 몇 명 안되지만 독자(?)들께 공개적으로 약속도 했으니 어떻게든 쓰지 않을 수 없는 여건에 스스로 몰아넣은 형국이다. 작가 코스프레다.
우리의 기분은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대신에 기분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비춰 현 신체 상태의 피드백에 대해 뇌가 내놓는 최고의 순간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해석하기 위해 몸의 상태를 ‘읽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석하기 위해 표정을 읽는 것과 거의 같은 방법이다. - < 생각한다는 착각, 닉 채터 (지은이) / 김문주 (옮긴이) > 중에서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식은땀이 나는 생리적 현상이 몸에 나타나면 인간의 뇌는 오감을 총동원해 해석을 한단다. 그 순간에 내 앞에 이상형의 이성이 있으면 사랑이라고 해석하고. 연단에 서 있고 눈앞에 수 천명의 관객이 있다면 긴장으로, 술 취한 듯 지그재그로 돌진해오는 트럭이 시야에 잡히면 공포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연관 없어 보이는 감정이 때론 생리적으로 닮은 이유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같은 주장을 했다고 한다. 1884년에 발표한 감정 이론(theory of emotion)에서 감정은 몸에서 기원하는 본능적, 생리적인 것이지, 정신에서 기원한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우니까 슬픈 거라는 말. 감정-행동이 아니라 행동-감정 순이란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 중에는 작가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기준은 다음 글에 쓴다.)
책을 설계하고 목차대로 정해진 글을 쓰는 건 한동안 작가처럼 사는 것이다. 작가처럼 살면 작가로서 느낄 생리적인 몸의 상태를 경험할 테고 뇌는 작가스러운 감정으로 해석할 것이다. 최은영 작가(쇼코의 미소 저자)는 쓰면 작가, 안 쓰면 일반인이라고 했다. 책을 쓰는 동안은 작가 인척 살 생각이다. 척하다가 진짜 그리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예정대로 5월 말이나 6월 초면 이 책의 정해진 모든 꼭지를 쓰고 탈고를 한다.
뇌가 해석해 줄 희열, 벅참, 뿌듯함, 감동을 마구 느낄 작정이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랑도 할 테다. 앞으로 삼 개월 간은 제법 잘 쓰는 작가 인양 쓸 것이고 뇌가 착각하는 대로 방치할 거다.
기대하는 '~인척 하기'의 긍정적인 효과가 수필버거뿐만 아니라 아빠, 남편, 대표로서의 나에게도 전염되고 확산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