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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격 (1)

by 수필버거

"작가 ㅇㅇㅇ입니다."

"ㅇㅇㅇ 작가입니다."


작가 인터뷰 글을 자주 읽는다. 쭈뼛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저렇게 자기소개를 한다. 브런치에서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글쓴이가 본인을 작가 누구라고 칭하며 안부를 전하는 인사글도 가끔 본다. 출간 소식을 알리거나 글쓰기 클래스 모집 글의 첫 문단에 작가 누굽니다라는 인사로 시작하는 경우 있다.

'글 쓰는 ㅇㅇㅇ입니다'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부럽다.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서.

직업을 나타내는 말인데도 작가라는 단어에는 로망과 아우라가 묻어있다.

작가 자격증은 없지만 작가의 자격은 있는 것 같다.


브런치 작가 선정을 통과하고 가끔 글을 발행해도, 누가 나를 작가라고 농삼아 부르면 늘 겸연쩍었다. 그럴 때마다 브런치 작가입니다라고 브런치를 굳이 작가 앞에 붙여 방패로 삼았다. 나는 아직 작가라는 자의식이 없다. 작가에도 등급이나 계급이 있는 듯 느낀다.


자기 정체성의 문제다. 도대체 작가라는 자아는 어떻게 획득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몇 해 동안 품고 있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터닝 포인트는 어디쯤이었을까. 출간? 등단? 공모전 입상? 문학상 수상? 뜻밖에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루트를 밟지 않은 작가도 많은데?

스스로 작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사람은 분명 어떤 근거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의 뇌에는 검은 호문쿨루스 homunculus라는, 자신의 몸을 표현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얼굴을 알아보는 영역이 있고 색을 알아보는 영역이 있듯이, 자기 몸과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마이클 머츠니크 Michael Merzenich 교수는 우리 뇌의 호문쿨루스가 경험에 따라 확장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자신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정체성이 비대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왜소해진다는 발견이었습니다.
- < 메타버스 사피엔스, 김대식 > 중에서


정체성은 경험으로 확장이 된다는 반가운 글을 발견했다. 아래의 예를 살펴보자.

드라마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는 도서관을 전전하며 글을 쓰는 10여 년의 습작 기간을 거쳤다고 한다. 7년의 밤을 쓴 정유정 작가도 고된 간호사 일을 하면서도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 공모전을 바라보고 홀로 쓰면서 긴 시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겪지 않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브런치 북 출간 공모전 입상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거의 생업이 있다. 퇴근 후의 시간과 주말을 집중적으로 투자해 썼다고 봐야겠다. 역시 인고의 시간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100일, 1,000일 매일 쓰기를 수행(?)하는 브런치 작가도 심심찮게 본다. 시도해 보면 얼마 안 가서 알게 된다. 쉽지 않은 일임을. 아니, 엄청 어려운 일임을 곧 깨닫게 된다.

바쁜 기자생활을 하면서 몇 년 동안 매일 밤 두세 시간씩 소설을 썼다는 장강명 작가, 낮엔 생계의 글을 쓰고 밤엔 기약 없는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는 십수 년을 견뎠다는 김호연 작가(소설 망원동 브라더스 저자)도 있다.

모든 영장류와 대부분의 포유류는 ‘결정적 시기 critical period’라고 불리는 매우 특별한 발달 기간을 가집니다. 동물마다 이 시기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오리의 경우에는 태어난 다음부터 고작 몇 시간까지, 고양이의 경우에는 약 4주에서 8주까지가 결정적 시기입니다. 한편 원숭이는 태어난 뒤 1년까지, 인간은 10년에서 12년까지로 알려져 있지요.

결정적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시기에 뇌가 경험한 것에 따라 뇌의 하드웨어 대부분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주 발생하는 경험에 사용되는 시냅스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시냅스는 약해지거나 사라집니다. 이러한 결정적 시기를 발견한 공로로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인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는 197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지요.
- < 메타버스 사피엔스, 김대식 > 중에서


책에서 말하는 결정적 시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유아기, 아동기까지다. 그 시기의 경험에 따라 뇌가 하드웨어적으로 정리되고 강화된다고 한다. 물론 이 시기는 자연의 설계에 따라 자연적으로 통과하는 기간이다.

위에 언급한 작가들의 자의식은 그들이 이겨낸 각고의 시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겠다.

많은 뇌과학 실험 결과는 성인이 돼도, 노년이 돼도 특정한 시간 동안 집중적인 노력을 하면 작게라도 시냅스가 새로운 연결망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어른의 결정적 시기에 숙성의, 축적의 결정적 시기란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퇴사 후 창업으로 사장이라는 자아가 필요한 사람, 작가로 화가로 가수로 크리에이터로 퍼스널 브랜딩에 도전하는 사람에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새기는 제2의 결정적 시기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고난의 행군, 희망고문의 시기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집중적으로 그 일에 파묻히는 시간이 새 정체성을 쌓고 새겨 넣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겠다 결론에 이르렀다.


몇 월 몇 일까지처럼 기한을 정해도 좋겠다. 체감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괜찮겠다.

나는 '작가 수필버거입니다'라는 말이 쑥스럽지 않기까지 1년을 상정하고 투입해 보기로 했다.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중도 포기를 막기 위해, 보람이라는 자기 포상을 위해 중간 목표가 있으면 효과적이겠다.

자격 고민의 답을 찾은 듯 하니 또 다른 기준을 찾아야 했다. 뭐가 이래 어렵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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