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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격 (2)

by 수필버거

서른에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 만든 명함에 차장 직함을 썼다. 두어 달 후, 이건 좀 너무한데 싶어서 바꾼 게 부장. 스타트 업이란 용어도 없었고 사업은 동종 업계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나서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짙은 시절이었다.

새파란 젊은이가 사장이라 하면 무시당할까 하는 지레짐작에 영업관행, 업계 룰을 잘 몰라서 실수라도 하면 윗선에 보고하는 모양새로 시간을 벌 잔꾀를 더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마음 한 켠에는 패기라고 이름 붙인 무식한 용기가 있었고, 아직은 사장 명함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마음에 같이 있었다. 사장의 자격은 회사가 굴러갈 수 있을 정도의 매출과 이익, 그리고 몇 명이라도 직원을 둘 수 있어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일 년 정도 미친 듯이 좌충우돌 돌아다녔고, 내심 설정한 자격에 겨우 턱걸이를 하고서 대표 명함을 새로 팠다. 조금 떳떳 마음이 들었을 때였다.


작가의 자격을 노력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기간은 1년으로 정했다. 일 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매일 쓰기를 할까. 무엇을 매일?

매일 쓰는 것도 좋지만 이왕 시간을 투입하기로 했으니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자기 점검을 할 수 있는 마일 스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계 설정은 두 가지를 충족하길 바랐다.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 것, 앞으로 작가로 살아도 될지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


목차 쓰기와 씨름할 때 글쓰기 책들을 다시 살피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문구를 만났다.

산문작가를 꿈꾸는 분들께 내가 제안하는 목표는 ‘한 주제로 200자 원고지 600매 쓰기’다. 200자 원고지 600매는 얇은 단행본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분량이다.(중략)

원고지 100매 분량의 단편소설이라면 여섯 편을, 원고지 30매 분량의 에세이라면 스무 편을 쓰라는 말이다. 하나의 제목 아래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글들이어야 한다. 실용서도 마찬가지다. 제본 방식은 자유이고 전자문서 형태라도 좋지만, 보는 사람이 그걸 한 권의 책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완결된 형태로 만들기 바란다. 그리고 무엇이든 반응을 들어보라.

주관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이를 해낸 사람이라면 작가 지망생과 작가를 가르는 흐릿한 선을 넘어섰다고 자부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냈어도 괜찮고 아직 출간을 못 했어도 관계없다. 반대로 어떤 단편소설 한 편이 신춘문예에 운 좋게 당선됐다 하더라도, 아직 책 한 권 분량이 될 정도로 글을 쓰지 못했다면 그 선을 넘지 못했다고 나는 간주한다.
- < 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지음 > 중에서


이런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책은 없다. 있어도 여태껏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기준이 높고 버거워 보였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지금 작가 지망생이다.


글쓰기 책은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줄이라도 쓰면 작가예요, 글쓰기 어렵지 않아요, 매일 쓰세요 처럼 글쓰기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소프트한 책이 그 하나다. 그 바탕 위에 이런저런 팁을 전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는 보통 전업 작가들이 쓴 책인데 내용은 달달하지 않다. 쓰기의 어려움, 작가의 고단함, 등단과 출판까지의 지난함을 가감 없이 알려주는 책.

3년 전 브런치 작가에 도전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이런 떫지만 현실감 있는 두 번째 부류의 책이 도움이 많이 된다.


우선, 내가 쓴 글이 몇 자인지, 원고지 몇 매인 지 확인을 해봤다. 짧은 글은 500~1,000자에 원고지 3~7 매, 긴 글은 대략 2,000~3,000자에 원고지 12~20 매다.

브런치 글은 짧게 쓰려는 노력을 할 때가 많다. 나도 긴 글은 읽기 싫은 경우가 있으니 가독성을 위해 가능한 한 분량을 줄인다.

20매는 그리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20매 곱하기 글 30개면 600 매다. 내가 얇은 책 1권 분량을 쓰는데 3개월을 잡은 근거다.

주제와 목차 잡기에 2주 지체했지만, 목표까지 길어봐야 한 달 정도의 편차를 예상한다.


1년 동안 나의 마일스톤은 세 개다.

원고지 기준 600매의 브런치 북 두 권 발행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마일스톤이다. 첫 책은 5월까지, 두 권째는 6월에 시작해서 8월까지 마치려 한다.

분량이 늘거나 글이 안 풀리는 경우를 대비한 예비 기간 한 달 포함해서 9월까지 2권 탈고하고, 10월에 있을 브런치 북 출간 프로젝트 응모 예정이다.

마지막 목표로 단편 소설 쓰기에 도전해보려 한다. 장 작가는 원고지 100매가 단편 소설 분량이라고 하지만, 검색을 해보면 대개 공모전은 80매를 요구한다. 기준을 80~100매로 넓게 잡았다.

양으로 봐선 600매 보다 단편을 먼저 달려들어야겠는데 소설은 무섭다. 습작 한 번 해 보지 않아서 더 두렵다. 그래서 산문 혹은 에세이 두 권을 쓴 뒤의 뿌듯함, 그 여파에 올라타려 한다. 12월까지 짧은 소설을 마무리 짓고 싶은 게 지금의 욕심이다.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무리한 목표를 세운 이유는 김호연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계속 잘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당선 뒤 오랜 습작’을 하는 것보다는 ‘오랜 습작 뒤 당선’이 되는 게 길게 보아 유리하다.
- <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김호연 지음 > 중에서

많은 작가들이 첫 책 탈고 후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고 증언한다. 희열이 뿌듯함과 떳떳함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자격이 생겼다는 느낌이 뱃속에서 스멀간질 올라오면 (카카오) 톡 명함에 '수필버거 작가'라고 쾅쾅 박을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 달고나 같은 자기만족을 맛보며 혈당을 한껏 올릴 테다.


희열이 찾아올 시점이 궁금하다. 이 글을 묶어 브런치 북을 발행할 5월일까, 단편 소설 한 편을 마칠 12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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