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감

by 수필버거

휴일 리모컨 파도타기를 하다가 쇼생크 탈출의 끝부분, 출소한 레드(모건 프리먼 분)가 앤디(팀 로빈스 분)를 찾아 바닷가로 가는 장면을 다시 봤다. 영화가 레드의 내레이션과 시점으로 흐르는 걸 보면서 관찰자가 떠올랐다. 내 인생에 한 명 정도는, 나를 가까이에서 보고 잘 이해하여 훗날 내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글로 썼다.

___

잠 깬 새벽에 냉수를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다가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둘째를 보았다. 중학생쯤 됐었나. 왜 우냐는 내 말에, 화장실 가다가 빨래 건조대와 빨래집게를 보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울음이 났다고 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고 살다가 예상치 못한 물건 하나에, 반찬 하나에, 묵은 먼지 냄새에 툭 터지는 일에 대한 글을 썼다.

___

작은 공연장에서 인디 밴드 보컬의 탁월한 가창력에 반해서 숨죽여 들으며 재능을 생각했다. 뛰어난 재능도 기회를 만나지 못하면 중앙 무대에 서기가 어렵구나 하다가 나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작은 재능은 신의 저주라는 말로 이어지고 나는 글쓰기를, 어쩌면 사업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 날, 나는 글을 썼다. 무재능과 열정 과다(過多), 그게 나 같아서, 도달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여 여전히 서성이는 내가 슬퍼서.

“조그만, 단편 하나짜리 재능이라. 신께서 아주 부실하게 주셨군. 희망을 갖고 계속해서 작업하고 또 하고 마침내 젊음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신념을 가지고 일한다 이거죠? 그런 건 수도 없이 목격했지요. 작은 재능은 신의 가장 큰 저주라 이겁니다.”
- < 불가능한 대화들: 젊은 작가 12인과 문학을 논하다 , 오늘의 문예비평 지음 > 중에서

문득 드는 단상을 붙들고 오래 생각한다. 그 생각이 진하고 강해서 다음 날 또 든다면 글로 쓴다. 일기든 에세이든. 생각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기억, 문장, 지식으로 내 안에 저장된 것들을 불러내 부딪히게 한다.

내게 묻는다. 나는 왜 증인이 필요한가, 부모의 부재는 나에게 무엇인가, 어머니와의 불화는 아직도 남았는가, 이제 와서 재능을 의심해서 어쩌자는 건가를 묻고, 속을 헤집어 답을 찾는다. 찾지 못해도 글은 쓴다. 언젠가는 찾겠지 싶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게. 위대한 철학이 왜 대화에서 나왔겠나. 대화는 변증법으로 함께 생각을 낳는 거야. 부부가 함께 어린아이를 낳듯이. 혼자서는 못 낳아. 지식을 함께 낳는 것, 그게 대화라네. 내가 혼자 써도 그 과정은 모두 대화야. 내 안에 주체와 객체를 만들어서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거지. 자문자답이야. 그래서 모든 생각의 과정은 다이얼로그일세. 과거엔 나 혼자서 생각하고, 나 혼자서 다 만들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중략)”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구수한 된장 냄새, 팝콘 같은 이팝 꽃 색깔, 길버트 O 설리번의 얼론 어게인 노랫소리가 기억과 추억을 불러낼 때 썼다.

다정한 사람, 미운 사람, 뛰어난 사람, 안쓰러운 사람을 만나도 쓴다.

“그렇지. 글을 쓸 때 나는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겨.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나를 조금 더 잡아끄는 것에 관심이 생긴다. 좀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좀 더 오래 보게 된다. 그래서 달라 보이고, 달리 보이면 글을 쓴다. 글감 아닌 게 없다.


keyword
이전 17화모색과 사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