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도 뛰고 김연수도 뛴다. 킹은 매일 열 페이지를 쓰고, 베르베르는 날마다 4시간씩 쓴단다. 무라카미는 노벨문학상 후보, 김연수는 전업 소설가, 스티븐과 베르나르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들의 글쓰기 루틴은 지탱과 유지로 보인다. 하루에 몇 시간씩 가만히 앉아서 글만 쓰면 근손실과 거북목, 손목 터널 증후군 걱정이 들만하다. 몸을 쓰는 운동으로 균형을 잡아야 그 생활을 지탱하겠다. 단 며칠만 노트북을 멀리해도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데 몇 배의 시간이 든다. 취미로 쓰는 나도 그런데 전업 작가들은 감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클까, 이해된다. 루틴이 필요하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근데 너무 전문적이다. 일주일에 몇 시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루틴이 필요할까.
글을 쓰기로 한 날은 일정을 살피고 일과를 재배치하여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확보되면 백팩을 메고 카페로 간다. 집과 직장 사이, 제3의 공간.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렵다. 주문에 맞춰 제품을 만들고 발주처와 국가에 제출할 서류를 만드는 타동(他動)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자발(自發)의 글쓰기는 늘 2순위라서 걸핏하면 밀린다. 쓰다가 멈춰야 하고, 시작조차 힘든 경우도 많다. 집은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중간 지대가 필요해서 카페로 간다.
다니는 커피숍은 서너 군데인데, 곳마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다. 공간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좌석에 자리 잡고, 커피 주문을 하고, 노트북을 켜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튼다.
음악은 소리의 암막 커튼이다. 카페에서 글을 쓰기 위해선 소리와 소음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글쓰기 초기엔 클래식, 세미 클래식, 뉴에이지, 엠비언트 뮤직을 들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야 글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산만한 내 생각이 쫓아가지 않게, 되도록 가사 있는 음악은 듣지 않았다. 글은커녕 졸리기만 했다. 이게 아닌데.
맞는 음악을 찾는데 한참 걸렸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비트'가 답이었다. 강한 비트가 있되 속도는 빠르지 않은 하우스 뮤직, 딥하우스였다. 비트 강한 음악을 들으며 쓰고 있자면, 취향 참 독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쿵쿵거리는 저음의 일렉트릭 비트 소리는 튼실한 심장의 박동 같다. 묘한 안정감.
글쓰기용 플레이 리스트 음악은 내가 이름을 따로 붙였다. '장조(長調) EDM'.
느리게 쿵쾅 거리는 비트 위로 장조의 멜로디가 흐르는 슬픈 댄스곡 같은 음악. 내가 선호하는 장조 EDM에 맞춰 춤을 추려면 흐느적거려야겠다. 요즘 유행하는 댄스곡보단 BPM이 많이 낮다. 100~120 정도 되려나. 아무튼 그렇다.
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아 흰 화면을 째려보다가 한 줄 쓰고, 읽고, 지운다. 한숨이 난다. 몇 번을 반복한다. 포기하고 그냥 가버릴까. 밖으로 나가 서성인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생각은 수두룩한데 당최 정리가 안돼서 첫 줄을 시작하지 못한다. 쓰기는 잠시 미루고 전자책 앱을 켠다. 은유 작가의 책이 글 받이로 제일 좋긴 하지만, 다른 책도 읽는다. 주로 에세이다. 내가 쓰는 게 에세이니까.
남의 글을 읽다 보면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할 때가 많다. 베껴 쓰는 것도 아니고 필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저쪽 세상에서 이쪽 세상으로 사부작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일은 모색의 세계다. 방법과 실마리를 찾는 것이 일이다. 더 나은 상품을 만들, 더 수주할,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할 길을 항상 생각한다. 분석하고 답을 구한다.
글은 사색이다. 깊이 생각하고, 더 파고들고, 합치고 쪼개는 연상과 상상의 세상이 글쓰기다.
남이 주는 조건을 받아 소화하는 모색만 하다가, 장소를 바꿔 카페에 앉았다고 해서 바로 글을 짓는 모드로 바뀌기는 힘들다.
나의 글쓰기 루틴은 장면 전환 같은 것이다. 집과 회사의 중간 지대에 앉아 음악으로 커튼을 치고, 잘 쓴 남의 글을 다리 삼아 좌뇌와 우뇌를 잇는 뇌량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