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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과 발산

쓰기의 도구(2) 메모 앱

by 수필버거

사무실 정리를 하다가 먼지 쌓인 박스에 한가득 담겨있는 오래전 업무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해가 바뀌면 다이어리부터 장만하던 때가 아주 먼 옛날 같다. 스마트폰이 참 많은 걸 바꿨다.

이삿짐 풀다가 찾은 졸업 앨범을 아련하게 한참 들여다보듯, 한 권 한 권 오랫동안 뒤적였다. 온갖 업계 정보 메모와 마주쳤던 문제를 풀려는 고민의 흔적들. 뭘 그리 많이 적었는지, 뭔 고민이 그리 많았던지.


지금이라고 다를까. 코로나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내가 벌이지 않았다. 석유값을 올린 것도, 펄프 가격을 뛰게 한 것도, 물류비용을 인상한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나 사장은 알아야 한다. 열심히 스크랩하고, 메모하고, 기억에 넣어야 한다. 주어진 조건과 정보 속에서 방책을 찾아야 한다. 십오 년 전의, 십 년 전의 내가 하던 일과 같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그때는 늘 끼고 살던 다이어리가 정보와 생각의 보따리였고 판단의 근거였다.


처음엔 워드 프로그램에 글을 썼다. 많은 작가들이 워드, 한글로 글을 쓴다 해서 따라 했다. 클라우드를 사용해도 불편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만 쓰던 초기에는 괜찮았는데, 글감이 생각날 때 메모하고 고친 것을 일일이 워드에 옮기는 과정이 점점 번거로웠다. 메모 앱을 떠올렸다. 몇 가지를 전전하다 솜노트에 자리 잡았다. 편했다. 아무데서나 쓰고, 읽고, 고칠 수 있어서 좋다. 노트북, 태블릿, 폰으로 연동 되니 화장실에서도 쓸 수 있다. 메모 앱이, 스마트폰 출현 전까지 다이어리가 했던 역할 이어받았다.


책 쓰기를 시작하기 전엔 섬 같은 글을 썼다. 뚝뚝 떨어져 고립돼 있는 글. 쉽던 어렵던 한 개 쓰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연재 글 쓰기를 시작하고선 징검다리 같은 글을 계속 이어 써야 한다. 내가 만든 마감도 있다. 글 한 개를 마치면, 다음 꼭지의 제목과 메모를 솜노트 새 창에 옮긴다. 항상 주머니 속에 있어야 잊지 않는다. 짬짬이 생각을 하고 떠오르는 단서를 메모한다. 자잘한 생각이 모이면 시간을 만들어 각 잡고 앉아 쓴다. 제법 빠르게 스케치를 만들 수 있고 놓치는 것은 적다. 메모 앱은 항상 내 손 닿는 곳에 있어서 생각의 조각들을 잃지 않고 모아둘 수 있다.


메모 앱의 최근 노트는 늘 두 개다. 하나는 다음 글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엔 가장 시급한 회사일과 대책에 대한 단상을 쓴다. 글쓰기용 노트에 모은 정보와 생각으로 글 내고, 업무 노트로 길을 다.


업무용이나 글쓰기용이나 결과물을 내기 위한 도구로선 같지만 뭔가 방향이 달라 보인다.

일은 수렴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으로 고인다. 외부에서 들어와 쌓인 정보를 가공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피동적인 느낌이다. 주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글쓰기는 발산 같다. 주제를 정하고, 내 속에서 나온 내용으로 쓴다. 내가, 내 생각과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발신한다. 아무도 수신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튼 능동적이다.


수렴만 하면 매몰되어 질식할 것 같고, 발산만 계속하면 닳아 없어질 것 같다. 살아내기 위해 수렴하고, 살아가기 위해 발산한다. 근근이 균형을 유지한다. 메모 앱이 글과 일의 숨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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