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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도구스

쓰기의 도구(1) 노트북

by 수필버거
글쓰기를 결심한다. 장비를 사자. 사람일 어찌 될지 모르니 저렴한 노트북으로. 여차저차 하다 보니 도합 네 개를 사게 됐다. 핫핫핫. 장비가 뭐가 중요하랴. 어떤 작가들은 폰, 태블릿으로도 잘만 쓴다더라. 블라 블라 블라. 이게 글쓰기 도구에 관한 나의 스토리이고, 수필 버거의 정설이다. 아니,이었다.


사업이 한 번 망했었다. 지금은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조금 타격력 있던 일정도로 생각한다.

몇 년 고생 끝에 밥술 걱정 겨우 덜었을 무렵,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실패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될 거야'는 다짐이었고, '설마?'는 마음의 소리였다.


주변에 사람이 다시 모이고 아내도 웃음을 되찾았는데, 내 마음은 허했다. 마음의 소리가 번번이 다짐을 이겼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 공허를 털어놓으니, 추락의 높이를 생각하라고, 이 정도면 빠르게 안정을 찾은 거라고 했다. 과욕은 버리고 만족하라는 소리다. 친구의 말은 위로로 여기며 고맙게 받았지만, 내겐 지나던 행인의 '파이팅!'처럼 무의미했다. 십수 년의 시간과 노력이 마냥 헛 산 세월로 기억에 고착될까 무서웠다. 글쓰기가 하고 싶다는 생각엔 아마도 대체 심리 같은 것도 스며 있지 않았을까.


처음 글쓰기용 노트북을 사야지 했을 무렵엔 LG 그램이 대세였다. 1kg가 안된단다. 사고 싶었다. 사면 글재주가 사은품으로 따라올 것 같았다. 몇 달간 서칭을 했다. 그리고 시세보다 약간 싸게 샀다. 그 후에도 그램을 한 번 더 샀다. 살 때마다 큰 애와 막내의 입학과 맞물려서, 둘 다 선물로 줬다. 사용감은 거의 없는 것들이었다. 별로 쓰질 않았으니. 선뜻 물려준 마음이 마냥 애비 마음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다시 구매하는 과정, 서칭하고 비교하는 동안의 '시간'이 내게 필요했던 것 같다.


노트북을 싸게 사봐야 얼마나 절약했겠나. 20만 원 안팎이다. 그냥, 시원하게 질렀어도 됐다. 그러지 않고 검색과 비교를 오래 한 건,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뛰어들기가 두려워서 시작을 늦추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운칠기삼이라고 운이 없어 사업 실패를 했다고도 하지만, 능력과 재능 부족의 혐의가 짙다고 자평했다. 한마디로, 모자란 인간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무모하게 큰판을 벌였던 거라는 후회와 회한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기였다.

글쓰기에서조차 실망을 반복하면 어떡하나, 그러면 뭐로 나를 지탱하나. '하면 잘할 텐데 여차 저차 한 사정으로 시작하지 못하는 영역'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심중에 있었던 것 같다. 시작해서 또 다른 부족을 확인하기가 두려워서 시간을 끌었던 건 아닐까. 시간 지연 그 자체가 회피의 도구였다.


지금 쓰는 노트북이 네 번째 노트북이고 보급형이다. 중고나 리퍼비시는 아니다. 이 노트북으로 책(분량의 글)을 열심히 쓰고 있다. 긴 글을 쓰면서 재능보단 지속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재능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지만, 없은들 어떠랴 싶은 마음도 든다. 쓰고 싶어 쓰겠다는데. 유명 작가가 못 된들 또 어떠랴. 하고 싶은 걸 해 보겠다는데. 글쓰기를 그만두더라도 이 노트북은 남을게다. 책을 쓰던 추억도 함께.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길게 얘기를 했다. 회사일과 계획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늘 미안한 내 마음도 다시 한번 전했다.

아내는 흥하고 망했던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 했다. 코로나도 끝나가는 듯 하니, 잘해보자고 했다. 단, 무리는 하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대인배다.


아내를 보내며 생각했다. 나는 돈만 잃었구나. 젊음을 바쳐 미친 듯이 일했던 그 시기가 정말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했을까를 생각했다. 뭔가 내 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쓰며 나를 생각한다. 글쓰기는 지난 시절의 나와 화해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때의 나를 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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