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 분실인 것 같습니다.” - <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관내 분실, 김 초엽 지음 > 중에서
그 이상한 상품의 견본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감을 앞둔 사무실에 있었다. - <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감정의 물성, 김 초엽 지음 > 중에서
신예 작가 김 초엽이 쓴 단편소설의 첫 문장이다. 훅 들어온다. 다짜고짜. 단도직입.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첫 문장이 다른 세상으로 순간 이동하는 포털 입구처럼 느껴진다. 보통의 하루는 타임 루프에 갇힌 듯 단조로운 날이 많다. 그런 날 책을 펼친다는 건 작가의 세상, 작가가 만든 세계로 통하는 포털로 훌쩍 뛰어드는 일 같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중에서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어도 머릿속에 콱 박혀있는 문장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돌아가 다시 읽으면 맛은 더 살고 의미는 더 깊다. 첫 문장의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김훈 작가의 대표작, 칼의 노래의 첫 줄이다. 짧은 한 줄에 소설의 주제와 글의 분위기, 작가의 의도까지 다 담았다. 내겐, 닿고 싶지만 영영 닿을 수 없는 경지로 보인다.
첫 문장은 유혹의 초대장이다. '이 책(글)은 이래요.' '제목을 보고, 목차를 훑고 여기까지 오셨으니 이 첫 문장으로 여행을 계속할지 정하세요.'라고 쓰인 하얀 카드를 받아 읽는 느낌.
첫 문장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루의 행적만 쓰면 일기다. 그 하루란 일상에서 길어 올린 생각과 느낌을 쓰면 에세이다.
오늘 하루를 글로 쓴다고 가정해 보자. 별 다를 것 없는 단조로운 날이었지만, 글은 써야겠고 특별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 하루를 재료로 삼을 수밖에 없다. 똑같은 하루라서 실망을 했을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무난한 날이라서 오히려 고마웠을까. 곰곰이 들여다보고 어제와 똑같은 하루는 없구나 싶을 때 글을 시작할 수 있다. 실망도 고마움도 얼마든지 주제로 삼을 수 있다. 퇴근 무렵에 남는 그날의 느낌을 톤 앤 매너 삼아 하루를 몇 덩이로 나누어 흔들고 섞어 느낌 쪽으로 끌려 모이는 것만 남긴다. 두괄, 미괄, 도치, 수미상관, 어떤 형식을 사용하든 남은 덩이를 자연스레 주제로 흐르게 배치하면 플롯이 된다.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 같은 짧은 글에도 플롯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침 산책을 하던 숲길의 소나무가 첫 줄에 등장해도 좋고, 더운 낮에 먹은 차가운 국수 한 젓가락으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 하루를 마칠 때의 마음(실망스러운 하루 거나, 고마운 하루)으로 잘 이어지게 하루의 조각들에 자리를 정해주면 첫 문장이 스륵 떠오른다 글쓰기를 제대로 한지 겨우 네 달째. 아직은 이런 방식으로 쓴다. 이 글(책)은 쓰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의 기록이니까, 아직 부족하지만 내가 쓰는 방식, 내가 첫 문장을 찾는 방식을 용기 내어 얘기한다.
책을 읽을 때 첫 문장이 좋은데 재미없어서 덮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 연유로 많은 글쓰기 책에서 첫 문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방법과 실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훅 치고 들어오는 첫 문장, 건조한 듯 간결한 첫 문장, 독자를 낚아채서 작가의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첫 문장, 어조는 서늘하고 어감은 간결한 첫 문장.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로망이며 환상이다. 헛된 생각이나 허상으로만 남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