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년 / 감독 가스 제닝 /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영국식 풍자 가득한 B급 감성의 SF 영화다. 영화 소개는 생략한다.
옛날, 아주 먼 행성의 주민들이 우주에서 가장 똑똑한 슈퍼 컴퓨터 딥 쏘우트(deep thought)에게 궁극의 답, 즉 생명과 우주, 그리고 만물의 답(the answer of life, universe and everything)을 요구하고, 컴퓨터는 계산을 해서 답을 줄 테니 750만 년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습관 같은 건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관련 서적부터 찾는다. '글쓰기' 검색을 하고 몇 권 구해서 읽었다. 적시에 적절한 사람 또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래서 운은 타이밍이다. 굽이굽이 돌 때마다 만나서 도움이 됐던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참고가 되면 좋겠다.
1. 글쓰기 101 : '에세이가 써보고 싶으세요' (김은경 저 / 호우)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막했다. 어디서 뭐부터 해야 할지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영화 리뷰도 끄적여보고 독후감도 써봤다. 무엇을 쓰긴 쓰는데 아무것도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울창한 숲 속에 서 있는 기분. 여긴 어디? 어디로 가야 길을 만날까.
당시 내가 찾던 책은 이코노미 원오원(101) 같은 개괄서였다. 전체적인 그림을 스윽 보여주는 지도 같은 책이 필요했다. 공개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출간이라고 봐도 된다. 간절함의 강도, 목적성의 뚜렷함의 차이만 있을 뿐. 김은경 작가의 책을 읽고, 에세이부터 시작하면 되겠구나, 목적지에 이를 '길'이란 걸 저기 어디쯤에서 만나겠구나 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글쓰기가 하고 싶지만, 출발선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2. 글쓰기 방향타 :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저 / 메멘토)
브런치 작가가 된 초기엔 나도 의욕에 차 있었다. 책(분량의 글)을 쓰는 요즘보다는 적게 썼지만, 작가(?)가 됐다는 기쁨과 브런치라는 환경에 취해 꽤 썼다. 쓸수록 솜씨가 나아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재능에 대한 의심은 커지고, 의욕은 10% 남은 휴대폰 배터리 줄듯 급속히 방전됐다. 잠깐의 취미로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쓰기를 멈췄다. 이렇게 포기하긴 싫은데.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만났다. 빨간 연료 게이지 경고등이 점멸하는 차로 고속도로를 가슴 졸이며 달리다가 주유소를 만난 기분이었다. 벌컥벌컥 읽었고 가끔이나마 다시 쓸 수 있었다. 입문용으로도 훌륭하지만 글쓰기를 하는 동안은 언제라도 읽으면 방향을 고쳐 잡게 도와주는 책이다.
3. 글쓰기 마중물 : '쓰기의 말들' (은유 저 / 유유)
작가가 수집한 문장을 읽는 맛도 좋고, 작가의 문장도 내겐 교본 같았다. 이 책은 요즘도 쓰다가 답답할 때 꺼내 먹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커서와 눈싸움만 하는 날, 다시 편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은 책이다. 희한하게 이 책을 읽으면, 쓰고 싶은 마음이 스윽 일어나고 뭐라도 쓰게 된다. 자주 내 글을 끄집어 내주는 책이다.
4. 작가 말고 저자가 돼보자 : '책 한번 써 봅시다' (장강명 글 / 이내 그림 / 한겨레 출판사)
앞의 글에서 밝힌 대로 지금 쓰고 있는 이 책(분량의 글)을 시작하게 한 책이다. 이 글에 다음 글을 더하면, 원고지 200매를 넘긴다. 1/3 지점까지 온건가. 오호....
김은경 작가(에디터)의 책에서 에세이의 뼈대를 배웠다면, 장강명 작가의 책으로 다양한 형식의 글(에세이, 칼럼, 소설 등)을 쓰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봤다. 원고지 600매 쓰기를 마치면 진짜로 작가가 된 기분이 드는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성취감은 느낄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작은 목표, 동기부여가 필요한 딱 그 시점에 짠하고 나타난 독려의 책이다.
내 글쓰기의 전과 후를 나누는 분수령이 있다면, 브런치 작가 선정이 그 첫 번째였고 랜선 글쓰기 모임 가입이 두 번째라고 생각한다. 모임 덕분에 '자주 쓰기'가 몸에 익어 가면서 책 쓰기(작가 자의식 갖기)가 하고 싶었고, 책을 쓰면서 내친김에 더 달려보자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 책의 목차를 짤 때 레퍼런스로 삼기 위해 예전에 읽었던 책도 다시 읽고, 새로 나온 글쓰기 책을 읽으며 흐릿하던 구상이 점점 구체성을 띄기 시작했다.
5. 소설 한번 써봅시다 :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지승호 저/ 은행나무)
사업을 시작할 때의 꿈 중에 창조가 있었다. 내 손으로 나만의 독창적인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 꿈이 짜부라지고 난망해져서 글로 대체하려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짧은 소설로 나만의 공감되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 꿩 대신 닭이거나, 닭 대신 꿩이거나, 무슨 상관이랴. 내 인생의 해가 뉘엿한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할 것 같다. 해보자. 김 작가와 정 작가에게 고맙다. 마음먹게 해 줘서.
이 책 다 쓰고, 다음 에세이집 600매까지 마치면 단편소설 쓰기(원고지 80~100매)에 도전할 작정이다.
6. 수필버거 유니버스를 만들어 볼까 : '나의 아저씨' (박해영 저/ 세계사)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김호연 저/ 행성 B)
영화, 드라마도 독서처럼 편식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 작가, 감독 것만 본다. 유별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잘 만든 드라마를 볼 때면, 작가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글로 창조한 세상과 인물이 영상과 배우로 실제처럼 보이고, 작가가 쓴 대사가 살아있는 언어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대본집은 구입하지만 꼼꼼히 읽지는 않는다. 형식이 낯설어서 대강 읽는다. 모래시계(송지나 작)는 1권만 읽었다. 송지나 작가는 대본을 어떻게 쓰는지가 궁금해서 읽었다. 기생충은 순전히 스토리 보드북이 궁금해서 샀기 때문에 시나리오는 거의 읽지 않았다. 영화를 계획하는 방식에 대한 호기심만 충족했다.
'나의 아저씨' 대본집은 달랐다. 얼마 전부터 짬짬이 읽고 있는데, 묘사 없이 짧은 지문과 대사만으로 스토리를 풀며 끌고 간다는 것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박해영 작가 덕분에 소설 다음에 단편 시나리오 쓰는 경험도 꼭 해보고 싶다.
김호연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이며 소설가이다. 그의 책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는 작가 자신의 연대기이면서 작법서다. 김 작가의 책은 재밌고 술술 읽힌다. 시나리오 쓰는 방법에 대한 팁도 들어있다.
대본 쓰기는 내년쯤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750만 년 후 행성인들은 답을 듣기 위해 딥 쏘우트에 앞에 모이고 컴퓨터가 궁극의 답을 발표한다.
"42."
군중들은 꽃을 바닥에 팽개치고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고 나서 딥 쏘우트가 한 말을 요약하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는 소리다. 질문이 제대로라야 좋은 답을 얻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요?"
작가들이 강연이나 북 토크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라고 한다. 내가 많은 글쓰기 책을 찾아 읽은 이유도 똑같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