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노트북을 충전기에 꽂으며 윈도 '업데이트 후 종료'를 누르고 잤다. 아침에 회사에 잠깐 들렀다가 커피숍에 왔는데 와이 파이 연결이 안 된다. 와이파이 켜기 버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블루투스 아이콘만 보인다. 설정을 뒤져도 와이파이 아이콘이 안 보인다. '다시 시작'을 하고 노트북이 다시 켜지며 와이파이 연결됨 아이콘이 뜬다. 이제야 내가 셋업 한 순서대로 아이콘들이 정리돼 있다. 폰이나 태블릿 기능이 꼬일 때, 새로 고침이나 다시 시작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는 걸 배운 셈 친다.
물가 인상이 심각하다. IMF 사태 이후로 처음 보는 미친 물가다. 조짐은 이미 재작년에 시작됐지만, 작년 사 분기부터 때때로 가슴이 철렁하더니 금년 들어 공문이 올 때마다 이게 가능해? 하는 생각이 드는 지경이다. 3월에 원청업체와의 업무 미팅에서 인상 예정을 통보했고 자기들도 물가 급등은 잘 알고 있다며 불가피함에 공감했다. 4월에 인상안을 만드는 중에 5월 1일 자로 또 한차례 인상한다는 제지(製紙) 사의 공문을 받았다.
오래 알고 지낸 원청업체의 본부장과 통화를 했다. '제안서 안 보내세요?' 하길래 '보시면 놀라실 거 같은데요.' 했다. '저희도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있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이건 또 뭔 말이야, 여차하면 최악의 경우도 대비하라는 엄포 같은 건가. 인상안 수정을 했고 메일을 보내야지 하는 차에 또 공문을 받았다. 삼 분기에 한 번 더 인상 요인을 반영하겠다는 안내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전쟁이 난 게 아닐까 싶었다. 메일 발송은 보류했다.
지난달 납품을 마무리하고 이미 회사에 입고되는 인상 가격에 예고받은 인상률을 더해 새로 계산을 했다. 우선 최소 인상안을 만들었다. 코로나 2년 동안 대폭 줄어든 발주량을 대입해서 프로젝션을 했다. 이 정도 인상률로는 엑셀 상에서도 근근이 돌아가는 수준의 이익률만 나온다. 시뮬레이션에서 이 정도면, 현장에선 약간의 변수만 생겨도 숫자가 빨간색으로 바뀔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총 여덟 개의 인상안을 만들어서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최종적으로 적당한 타협의 인상률 적용안과 최대 인상률 반영안, 이렇게 두 가지를 남겼다. 원청업체의 입장에서 분석도 했다.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그들의 마진을 계산했다. 내가 그들이라면, 타협선의 인상안도 받기 어렵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대치 반영 안을 보면 '이제, 거래 그만합시다' 하겠다 싶다. 고민에 빠졌다. 벌써 5월이 시작된지도 열흘 가까이 지났다. 입고도, 납품도 멈췄다.
지난주 화요일 밤, 두 개의 메일을 썼다. 내용은 동일하다. 첨부 파일만 다를 뿐. 타협안과 최대 인상안. 밤 10시경이었다. 하루 일과에 치인 직장인이 쉬고 있을 시간이다. 사람 놀라게 하는 메일을 이 시간에 받게 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과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는 마음을 더해서 임시 저장함에 메일 두 통을 보관하고 퇴근했다. 소주 반 병을 마시고 잤다.
수요일 아침 7시 반에 출근했다. 냥이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뒤뜰을 서성거리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걸을까. 드라이브라도 할까. 팔조령 꼬부랑 옛길 꼭대기의 인적 드문 휴게소 생각이 났다. 자전거로 가끔 올라가는 곳이다. 편의점에 들러 스타벅스 모카 한 병과 담배를 사고 팔조령으로 차를 몰았다.
이 글이 매거진의 열아홉 번째 글이고, 미리 만든 목차에 따른 주제도 있었다. 정해진 소주제로 글을 네 번 쓰고 네 번 버렸다. 생각이 이끌어주지 못하고 받쳐주지 못하는 글을 시간에 쫓겨 억지로 썼고, 글은 누더기가 됐다. 날짜는 따박따박 흐르고 예정대로 브런치 북 발행을 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은 나는데 진도는 못나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렇게도 글이 안될 수도 있구나, 포기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53개의 글을 써서 브런치 북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진즉에 조금씩 수정하고 있었다. 두 개의 꼭지가 한 개로 줄기도 하고, 순서가 바뀌기도 하면서 목차에 약간씩 변화를 주고 있기는 했다. 주제의 문제인지, 내가 처한 상황의 문제인지, 긴 호흡의 글쓰기가 원래 이런 정체기를 갖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답답한 상태로 5월 둘째 주를 지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이차선 국도를 올라가면 오래된 팔조령 휴게소가 나온다. 높진 않지만, 청도 방향으로 열린 휴게소 마당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 경치가 꽤나 시원하다. 산 아래로 도로가 보이고 논밭과 이서면의 작은 마을이 보인다. 맑은 날이어서 멀리 청도 시가지도 보였다. 모카커피는 달았고 오월의 아침 공기는 선득하고 하늘은 맑았다.
긴 고민의 뿌리에는 업을 여기서 멈춘다가 있다. 그들에게 납품할 생산업체로 내 회사가 유일무이하지 않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원청의 일을 받을 업체도 있을 게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한다.
서른부터 해 온 이 일을 그만두는 게 맞는 일인가, 그만두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만하면 난 뭘 할까, 눈물이 날까. 두 개비 째의 담배를 꺼내 물고, 임시 보관함 속 메일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읽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최대치 적용 안이 담긴 메일의 send 버튼을 눌렀다. 음악을 크게 틀었다. 텅 빈 휴게소 주차장이 휑해 보였다.
와이파이에 다시 연결된 노트북에 솜노트 새 창을 띄우고 커피를 받아왔다. 매거진 목차를 불러냈다. 이번 꼭지를 못쓰는 원인이 뭐든, 목차 수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넘게 쓰지 못하는 주제라면 버려도 된다. 이미 완료한 목차는 발행 글의 제목만 남기고 메모는 삭제했다. 남은 목차도 몇 개는 지웠고 몇 개는 제목과 쓸 내용을 수정했다. 새로 고쳐서 다시 쓰니, 목차가 간결하고 선명해졌다.
주제를 바꾸고서야 이 글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지금 이 주제를 왜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고, 이 글은 지금 아니면 못 쓸 글이구나 싶고, 억지스러운 느낌은 살짝 들지만 매거진 순서에도 어느 정도 맞는구나 싶다. 마치 이렇게 될 일이었던 것 같다.
메일을 보내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래도 아홉 시 전이었다. 답장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떴다. 빠르기도 하지. 담당과장의 메일엔 예상보다 '아주' 높은 인상률에 '깜짝' 놀랐다는 내용과 '심도 있는' 내부 논의를 해서 연락드리겠다는 글이 있었다. 그렇겠지. 그들도 비상이 걸렸으리라.
꼭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처리하고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눈에 띄는 SPA 매장은 다 들어갔다. 뭐가 이렇게 많아. 많이 걸은 후에 청바지 두 개를 샀고 늦은 점심으로 우동을 먹고 분식점 앞 공원 벤치에 앉았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슬프지도, 괴롭지도, 걱정이 들지도 않았다. 걱정은 이미 많이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사업을 여기서 멈춘다는 결론이 난다면, 맨날 놀러 오라는 제주도 친구 펜션에 며칠 가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행스러운 건 오래 해온 일을 이 나이에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뜻밖에도 내가담담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을 해오며 겪은 일들, 그러니까 웃기도 울기도 했던 그 경험은 영원히 내게 남아있을 게다. 그냥 간직만 한다면 라떼의 추억이거나 아픔과 슬픔이겠지만, 글로 쓰면 콘텐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괜히 겪는 일 없고, 괜한 인생 없다. 이쯤에서 내 삶의 새로 고침,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른다고 한들 인생 낭비이거나 마냥 억울한 일만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는 내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