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여행그램 008. From Civita, Italy
한장여행그램 008. 천공의 성 라퓨타가 죽어간다.
죽어가는 도시 치비타 디 반뇨레죠.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받는 아이러니.
로마 여행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빈틈없이 화려한 조각상들로 가득 메꿔진 로마는 아름답다는 수식어와 잘 어울렸지만, 어째서인지 나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여행책과 텔레비전에서 훔쳐보던 로마가 더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건 무슨 심보일까. 관광 포인트를 찍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스페인 계단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이 앉았던 스페인 계단에서 심드렁하게 여행책자를 뒤적거렸다. 오드리 헵번처럼 젤라또를 먹고 싶었지만 앉아서 먹는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물만 홀짝이기로 했다. 그곳에는 따뜻한 햇살을 이불 삼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이탈리아 젊은 커플과 다국적 관광객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로마의 휴일 같았고, 반면 내 표정은 마치 내일 출근해야 하는 일요일 저녁의 직장인 표정처럼 무미건조했다.
아, 나도 로마를! 이탈리아를 즐기고 싶다. 라는 생각이 뻗었다.
그리고 그때 뒤적거리던 여행책자에서 '사라지는 도시, 치비타 디 반뇨레죠를 만났다. 로마 근교 여행지로 하루 정도만 투자하면 이탈리아의 소도시를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도시의 북적거림과 정교함보다는 시골의 투박함과 한가함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고의 여행지였다. 게다가 풍화작용으로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매료시켰다.
'이렇게 웅장한 도시가 기껏 바람으로 사라진다니! 이건 눈으로 직접 봐야 해!'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계획을 변경해 로마 시내 관광을 접고 작은 배낭을 하나 쌌다. b&b 마담에게는 조금 늦을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치비타 디 반뇨레죠'를 향해 출발했다. 치비타 디 반뇨레죠를 만나기 위해 꽤 많은 발품을 팔아야 했다. 거리에는 사람보다 조용한 집들이 더 많았고, 차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겨우 물어 물어 치비타 디 반뇨레죠의 이정표를 만날 수 있었다.
숨이 슬슬 차오를 때쯤 눈 앞에 천공의 성 라퓨타가 하늘을 벗 삼아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비타 디 반뇨레죠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실제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바람과 물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마을 주변의 산이 서서히 깎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언제 무너져 사라질지 모르는 관계로 마을 안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현재는 이탈리아 정부에서 관광지로 매년 유지보수를 하고 있어 거주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대신 관광객들을 맞이해주는 것은 작은 식당과 카페 그리고 라퓨타 성안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비경뿐이다.
육지의 섬이라는 별명 답게 성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건너야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리의 높이는 어마어마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차게 불면 다리 위에서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죽음의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답다고 해야 할까? 여타의 관광지로 들어가는 걸음도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긴 도로가 끝나 본격적으로 마을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마을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은 몇 없었다.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었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소도시의 풍경을 듬뿍 담은 사진들이 신기할 정도로 하나같이 막막한 적막함이 묻어난 것이다.
같은 집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들 드나들지 않는 집은 굉장히 큰 차이가 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흔적이 매일 매일 묻어나는 집이 더 빨리 노화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후자의 집이 그렇다고 한다. 사람이 내뿜는 삶의 온기 그리고 관심이 차가운 철근과 딱딱한 벽돌 사이사이 끈적하게 새어 들어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집에서 산다는 것은 집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폐가는 사람과 공존관계가 깨지면서부터 쓸쓸하게 폐가로 전락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비타 디 반뇨레죠의 집들은 공존관계가 무너진 빈 껍데기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렌즈를 들이밀어도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주인을 잃은 집들의 쓸쓸함뿐이었다. 풍화작용으로 토양이 무너져내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치비타 디 반뇨레죠'. 이 마을의 별명은 '죽어가는 도시'.
관광객들의 마음을 훔치고도 남을 자극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죽어가는 도시'가 아닌 '이미 죽어버린' 도시를 만났다. 몇 백 년 후에는 사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을 이 곳을 직접 와 봤다는 열망으로 찾았지만, 내가 얻어간 것은 '이미 죽어버린' 폐허의 목격이었다.
풍화작용으로 산이 깎여 하늘을 떠다니는 섬 모양이 되지 않았다면, 이 곳은 지금의 적막함 대신 살아있는 생동감으로 가득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겠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받는 아이러니가 가득한 이 곳. 사람이 떠났기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는 치비타 디 반뇨레죠. 여행지로 사랑해주기엔 나에겐 너무 어려운 곳이었다.
도시의 화려함이 싫어 찾아온 이 곳에서 허무한 적막함을 느끼고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숲길을 헤치고 다시 돌아온 로마의 북적임이 어제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거리의 조각상들도 사람의 온기로 감싼 느낌이 들었고, 의미 없이 쏟아지던 분수대의 물들도 하루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어가는 도시에서 내가 찾은 것이 로마의 따뜻함이라니.
여행자의 마음 역시 참 아이러니하다.
한장의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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