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은 화폐인가, 아니면 기술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새로운 금융 상품의 성격을 규정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국가의 통화정책, 금융 시스템 안정성, 글로벌 경쟁력,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혁신 역량을 모두 관통하는 문제다. 최근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가 밝힌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전략은 이 논쟁의 무게감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초기에는 은행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점진적으로 안정성을 검증하면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배경에는 금융 안정성, 금산분리 원칙, 외환 관리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구조적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국내 거래소에서도 거래 비중이 20%를 넘어섰고, 이는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자본 유출과 외환 관리의 통제력 약화라는 문제를 낳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정의하고 다뤄야 할지는 한국 사회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스테이블코인은 기본적으로 법정 통화(USD, KRW 등)에 연동되어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이는 변동성이 심한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과는 달리, 실물 경제에서 결제와 송금, 가치 저장의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크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전문가와 시장 참여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달러’, ‘디지털 원’으로 부르며 새로운 형태의 화폐로 인식한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글로벌 무역과 송금의 영역에서 힘을 얻는다. 예를 들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국가 간 송금의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며, 중개 은행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낸다. 만약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제대로 자리잡는다면, 한국의 해외 송금 산업과 무역 결제 구조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화폐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시각은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디지털 자산이 아니라 ‘국가 경제 주권’과 직결된 문제라고 본다.
반면, 또 다른 시각은 스테이블코인을 화폐로 보기보다 ‘기술적 도구’로 해석한다. 블록체인과 탈중앙화 금융(DeFi) 생태계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거래 안정성을 제공하는 하나의 유틸리티에 불과하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겪는 가격 변동성을 완화하고, 스마트 계약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안정된 단위’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화폐가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 금융 혁신을 가능케 하는 ‘기술 인프라’에 가깝다. 이는 전통 금융 시스템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규제 당국 역시 스테이블코인을 화폐가 아닌 ‘디지털 자산’, ‘전자화폐’, 혹은 단순한 금융기술로 분류해야 한다는 입장이 생겨난다. 결국, 기술적 도구로 보는 시각은 스테이블코인을 국가 주권의 문제라기보다, 글로벌 디지털 경제에서의 효율성을 높이는 혁신적 수단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시각 차이가 규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발행 요건, 준비금 관리, 투자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면서 제도적 틀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일본 역시 은행과 신탁회사가 발행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제시하며, 금융 시스템 안에 스테이블코인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비은행·빅테크·대기업이 곧바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경우, 금산분리 원칙 위반, 은행 예금 기반의 약화, 자금세탁 우려, 외환 관리 리스크 등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는 단순히 보수적인 입장이 아니라, 국가 경제 안정성을 지키려는 현실적 고려다. 그러나 동시에, 과도한 규제가 국내 혁신을 가로막고 해외 기업들의 시장 점유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역설적 위험도 존재한다. 결국 제도 설계는 ‘속도와 안정성의 균형’을 잡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미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금융 생태계에서 ‘사실상의 디지털 화폐’ 역할을 하고 있다. USDT와 USDC는 글로벌 거래소와 결제 플랫폼에서 표준처럼 쓰이고 있으며, 그 비중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늦게 도입하거나 과도하게 규제한다면, 국내 금융시스템은 글로벌 흐름에서 고립될 수 있다.
또한,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내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확대 사용하게 된다면, 국내 화폐 주권과 정책적 통제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외환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자본 유출과 환율 불안이 발생하고, ‘김치 프리미엄’ 같은 왜곡 현상이 고착화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서, 은행 중심의 제도적 도입과 함께 핀테크·블록체인 생태계의 혁신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글로벌 금융 환경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잃지 않는 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화폐일까, 기술일까? 이 질문의 답은 어느 한쪽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것은 화폐적 성격과 기술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무게중심이 달라진다. 한국은행 총재가 강조한 ‘은행 중심의 단계적 도입’은 국가적 안정성을 지키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글로벌 혁신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기술적 도구로 활용하는 열린 태도 역시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화폐로서든 기술로서든,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한국이 그 가능성을 제약할지, 아니면 제도적 안전망 안에서 혁신의 에너지로 바꿀지는 앞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