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경영대학 이수경 제1대 총동문회장
"나는 산이 싫다. 나는 도시가 좋다. 나는 바위가 싫다. 나는 콘크리트가 좋다."
이것이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가졌던 신념이었다. 7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나는 늘 도시인이었다. 반듯하게 잘 닦인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이 좋았고,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이 취미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러했다. 외부 활동이라고 해봐야 고작 조찬 모임이나 강연, 네트워크 중심의 모임 정도였다. 그것이 내 일상이었고, 나는 그런 생활에 만족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참 묘한 것이다. 가끔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1년에 한두 번, 행경산악회와 함께하는 여정이 그렇다. 그것도 '산이 아닌 곳으로 갈 때만' 참여하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태안 해변길 1코스 바라길 트레킹. 얼마나 고마운 이름인가. '산행'이 아닌 '트레킹'이라는 단어가.
학암포 방파제에서 신두리 사구 해안까지, 14킬로미터. 숫자만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5년 만에 등산화를 꺼내고 등산 스틱을 챙기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산악대장은 난이도가 '하'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알았다. 이것은 결코 '하'가 아니라는 것을.
학암포 해수욕장에 도착해 산악대장이 "이제부터 신발고 양말을 벗고 맨발로 백사장을 걸어 갑니다"라고 해서 맨발이 되어 단단한 모래 해변을 걷고 바다물에 발도 담그니 모든 피로가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듯했다. 차가운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각은 어떤 고급 스파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암포 해수욕장을 지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태안 해안길인 '바라길'을 트레킹 한다고 해서 진짜 해안길만 걷는다고 믿었건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과 산길이었다. 내 기준에 깔딱고개라 불리는 오르막들은 마치 도시인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각 고개를 넘을 때마다 작은 성취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등산화가 발을 단단히 받쳐주고, 등산 스틱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동안, 나는 조금씩 자연과 교감하고 있었다.
늦가을의 하늘은 그 어떤 도시의 전망대에서 본 하늘보다 파란빛을 뽐내고 있었다. 바다는 마치 우리를 반기듯 끝없이 반짝였고, 바람은 우리의 땀을 식혀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가 우리에게 준비한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도시의 편리함이 줄 수 없는, 자연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 말이다.
산길을 걷다 만난 억새밭은 또 어떤가.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억새는 마치 살아있는 물결 같았다.
하산 후 들른 '안면수산시장'은 우리의 여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주었다. 제철인 속이 꽉 찬 꽃게찜의 단맛, 부드러운 아나고회의 고소함, 해산물 칼국수의 시원한 국물... 평소 화려한 도시의 맛집을 찾아다니던 내가 이런 소박한 맛에 이토록 행복해할 줄은 몰랐다.
문득 옆자리의 CEO와 얘기하다
"인생 뭐 있어? 좋아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경치 보면서 맛난 음식 먹는 거지."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행복이란 것이 사실은 이토록 단순한 것이었다는 걸. 하루하루 회사를 경영하며 끝없는 성과를 쫓던 우리였지만, 진정한 행복은 이렇게 소소한 곳에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자연이 선물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맛있는 음식.
어쩌면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도시의 편리함만을 좇으며, 자연이 주는 위안을 외면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 나는 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자연을 걸으며 나누는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을.
7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는 1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 조금 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비록 늦은 저녁이면 다시 도시로 돌아가겠지만,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행복은 도시와 자연의 균형 속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인생 뭐 있어?"라는 물음은 이제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더 이상 허무주의적인 체념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자의 여유로운 미소처럼 느껴진다. 오늘 나는 행복을 한아름 선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행복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다음 여정을 기다린다.
나는 이제 안다.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작은 행복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완성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인생 뭐 있어?"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순간, 그게 바로 인생이지."
산악대장이 헤어지기 전에 건배사가 자꾸 귓가에 여운을 준다.
"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행경 산악회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