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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

by 민주

끝! 사회자 대본을 다 작성한 오후. 노트북을 덮고 햇볕을 쬐러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승일이는 언덕을 오르면서 어제저녁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조잘댔다.


“결혼식 준비하는 게 설레는지, 빨리 해치우고 싶은지 묻더라고.”

“그래서 뭐라 그랬어?”

“난 후자.”

“뭐!?!?!!??!?!?!?!?!?!?!?!”


그 자리에 멈춰 인상을 빡! 찌푸렸다.

“정말 너 해치우고 싶은 일이야?!”

“아니, 아니..!”

그는 당황해서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도 그렇게 큰 서운함이 불쑥 튀어나온 것에 당황해서 애써 서운이를 꾹 눌러야 했다. (그래도 실망감은 들풀처럼 삐죽삐죽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니, 해치우고 싶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그런데 설렌다는 것도 아니야.. 음... 뭐라 해야 할까. 긴장감? 어, 그래. 긴장감!”


그는 결혼식을 콩쿠르에 비유했는데, 무대에 서기 전까지 늘 준비하고 연습해야 하는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 긴장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게 그의 정확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농담반 진담반이었던 뾰로통한 표정은 진즉에 풀렸고, 아, 이 사람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겠구나 싶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나의 위 팔을 꼬-옥 잡고 슬쩍 뒤로 물러나곤 하는 그는, 지금부터 그 시간에 대한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긴, 한 달 전만 해도 나도 비슷한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준비 잘 돼 가?”라는 무심한 안부 인사에 “응, 뭐~ 이제 시작하려고~”라고 천하태평처럼 대답을 하면 모두가 화들짝 놀라 당사자인 나보다 더 종종거렸다. 그것은 아마 내 마음속 주제와 변주를 들려줄 수 없어서 생긴 마찰이었을 것이다.


결혼식은 하나의 이벤트다. 폭죽처럼 펑- 터졌다 사그라질 사건. 그런 일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오직 그것만을 위해 몇 달을 매달리기에는, 나는 그것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너무 애쓰지 말자. 너무 완벽하려 들지 말자.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말. 최선을 다하자. 정성을 들이자.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D-DAY로 두고 하루하루 보낸다면 나 또한 심히 긴장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매일매일 최대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어떤 문구, 말, 음식, 음악으로 행복하게 해드릴까(감히 나 자신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를 고민하는 것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행복하길. 그것은 내 인생의 주제였다.


그것 하나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안다는 것! 이 지점이 중요하다!) 스쳐간 크고 작은 사건들은 전부 산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처럼 자연스럽게 겪어낼 수 있었다. 요가 수업도, 어린이를 만나는 것도, 이웃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촛불 집회에 가는 것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는 것도, 결혼식을 하는 것도... 주제에 대한 변주 같았다. 결혼식은 초대형 버전의 집들이이자 수업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것은 큰-일이자, 큰-일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매일매일이 곧 결혼식까지 걸어가는 나만의 아주 긴 행진이었다.


서운함이 완전히 잊힐 즈음, 꽃망울 맺힌 매화 길을 지나 언덕 너머의 너른 밭에 도착했다. 뒷집 할머니의 전동차가 보였다. 할머니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너른 밭에 홀로 앉아 나물을 캐고 계셨다. “할머니!!!” 코앞까지 다가가며 발걸음마다 할머니를 크게 불렀다. 할머니는 쪼그라진 주름을 펴며 “아이고야- 여까지 먼 일로 왔노?” 하며 그제야 허리야 피셨다. 산책을 하러 나왔다니, 바구니를 달라고 하셨다. 슬렁슬렁 밭을 걸으며 “내가 참 욕봤데이, 40에 남편 잃고 아들 셋을 키웠어~” 하시면서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 것들을 무심히 뽑아 넣으신다. 꼬박 그만큼의 세월을 더 살아오셨을 텐데 할머니는 어떤 주제와 변주를 가진 세월을 겪어오셨을까? 남편을 잃은 것도, 하나의 변주라고 여길 수 있게 될까? 들고 온 빨간 바구니에 냉이, 다래, 쑥부쟁이가 가득 찼다. 할머니는 “어여 가~” 하시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호미질을 하셨다.


돌아오는 길, 할머니의 집을 지나치는데 마당에 널브러진 말린 나물과 고무 대야, 농기구들이 보였다. 할머니에게 일은 끝이 없다. 완벽한 시작도 없었을 것이고 완벽한 끝도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마당에 흩어진 살림 도구들이 젊은 우리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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