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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살아 있는 루티 부케

by 민주

눈앞에 펼쳐진 길이 덤불로 뒤 쌓인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이 길을 걷지 않고 돌아서거나 물러서더라도 언젠가 이 길이 내 앞에 다시 등장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찔리고 긁히고 넘어질 뻔하더라도 가야만 한다. 그런데 수풀을 헤치고 가던 중에 어떤 흔적, 땅이 딱 두 발자국만큼 다져져 있다던가 수풀이 양쪽으로 벌어져있다던가 하는 흔적을 발견하면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게 된다. 누가 여길 다녀갔었구나! 맞나? 아닌가? 돌아갈까? 불안, 의심, 회의로 똘똘 뭉쳐진 긴장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할 때 즈음 맞주친 따사로운 햇살 같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은 살아있는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냥 편하게 식장에서 하지... (별나게)”라는 엄마, 어머니의 거센 바람을 등지지 않고 꿋꿋하게 결혼식의 의미를 창조해 내는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내게도 그런 살아있는 이정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웃는 모습이 해바라기 같은 유선. 그녀는 2년 전, 결혼식을 치룬 직후 캐나다로 갔다. 가기 직전에 하동으로 신혼여행을 왔고 <농사짓는 여성들 : 퍼머컬처 단체 <수락>의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적 노동 모색>이라는 자신의 논문을 건네주었다. 논문 속에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민들레, 옥수수, 들깨, 딸기 사이에서 나를 지칭한 해바라기를 찾아 수줍게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유선 또한 복잡하고도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결혼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라는 이름의 부모님의 ‘욕망’에 대응하느라 속을 많이 앓았다는 것을 나중에 그녀의 글로 알게 되었다.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관계망과 결혼이 종착역이라고 여기는 관계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고, 여성 주례를 섭외하려다가 오히려 없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다정한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덕담(기도) 시간에 부도덕한 언어가 흘러나오진 않을지 전전긍긍했었다. 비건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찾아봤지만 서울에는 없어서, 공장식 메이크업샵이 아닌 독립적인 업체를 찾아 받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식순, 의상, 식사 ... 하나하나 고민하고 싸웠던 기록들 중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마음이 편했던 부케 만들기 시간’이라며 <뿌리가 잘리지 않은 루티부케>라는 글을 공유했다.


뿌리가 잘리지 않은 루티부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언젠가 부케를 추천하거나 만지는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루티부케를 알려주어야겠다고 꼭꼭 기억해두었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뿌리를 살려두고 싶었다. 자유의 부케를 건네받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차례. 단박에 한 친구가 떠올랐다. 색깔을 읽을 줄 아는 친구, 숲을 집처럼 여길 수 있는 친구, 통념에 이식되기를 거부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친구, 해즈. 그녀에게 연락해 부토니아와 부케를 부탁했더니 그녀도 단박에 좋다고 대답했다. “답례는 섭섭지 않게 할게~”라고 말했더니, “답례는 너희들의 화산 같은 사랑으로 받을게~”란다. 점점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분위기이면 좋을지 상의하려고 몇 번 더 연락을 주고받는 중에, 해즈는 루티부케가 너무나 매력 있다며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루티부케는 정말로 뿌리가 살아있다. 보통 꽃다발은 절화를 사용해서 한 번만 보고 금세 죽게 되지만 뿌리를 살려 만든 꽃다발은 이식을 하거나 물꽂이를 해서 더 오래 살려둘 수 있다고 한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릴 적부터 자신의 뿌리를 뽑혀 여성 혹은 남성의 역할에, 특목고에, 명문대에, 어느 집안의 장녀, 장남, 막내, 회사원, ...으로 자라온 수많은 절화들의 아우성이 겹쳐 들렸다. 생존하려고 스스로를 죽여버린 그들의 꿈과 정신, 그 무덤 앞에 넓은 잎 아래로 우아하게 뿌리를 달고 있는 꽃다발을 올려주고 싶었다. 살아! 살아내야 해!


결혼식 전날 저녁, 꽃을 한 아름 든 친구가 도착했다. 미리 구상을 다 해놓고 그날 새벽 남대문 시장에서 직접 꽃을 골라왔다며, 물 묻은 신문지 뭉치를 안고 웃어 보인다. 숙소에 꽃을 두고 나와 식장이 될 야외 공간을 둘러보는데, “으아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뭘 놔두고 왔나? 싶었는데 해즈는 여기에 있는 꽃들로도 너무 싱그럽고 예쁘다며, 이팝나무, 동백, 개나리, 벚꽃, 해당화에 취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맞아, 예쁘긴 하지. 하지만 너의 화산 같은 사랑이 없다면 우린 시들어버리고 말 거야,라고 생각하며 해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홱! 돌며 말한다.


“아니 근데, 신부가 결혼식 전 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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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밤, 친구들의 숙소에서는 꽃꽂이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3.jfif 화관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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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웨딩 케이크에는 생화를 꽂아주었다. 내 생에 최고의 케이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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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끝나고 데려온 부케와 화관. 물꽃이를 해두니 한 달은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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