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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원 투수

by 민주

결혼식 전날 친구들을 부르면 코피가 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다들 그러던데, 만일 친구들이 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쌍코피가 터졌을 것이다. 두둔. 대망의 날 하루 전. 승일과 나는 식장을 청소하러 가기 전에 이웃 수진, 제이제이네에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승일이 설치할 포토존의 커다란 각재와 갖가지 음료, 게시판, 화병, 천꾸러미를 내리려고 도움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구수한 봄나물로 배를 채우고 코 앞에 있는 식장으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갔다. 하나 둘 짐을 내리고 숨을 고를 겸 후우-하고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내일 여기에 드레스를 입고 선다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이렇게 옷만 바꿔 입고 서 있어도 되는 거야?

약간 우중충해보이는 느티나무 앞에서 근심의 구름이 드리워지기 직전이었다.

“민주~ 식을 어디서 올린다고 했죠? 여기가 화사하긴 한데~”


수진도 공간 전체를 쭉- 훑어보더니 자그마한 해당화 한 그루를 가리켰다. 사진을 찍는 곳으로 찜해두었던 나무였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바꾸어야할 것 같았다. 하필이면 내일 적은 양의 비소식이 있어서 날이 흐렸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어디서 들어온다고 그랬지?

지금이 오전이니까... 햇빛은 여기로 들겠네. 그럼 여기를 중앙으로 하자.

사회자는 어디에 서고? 밴드는?

둘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톡톡 가리키면서 전체 공간의 배치를 깔끔하게 다시 정리해주었다. 그러더니 나무전지도, 광목 커튼 달기도, 꽃꽂이도 해놓겠단다. 과연 최고의 팀이 아니랄까봐!


경주에서부터 하동까지, 소박한 민박집도 5년을 이어오고 있고, 두 사람만으로 꾸린 비영리단체(HAB)로 인도와 네팔에 13년간 봉사를 하고 있는 수진과 제이제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대충~”이라고 말하지만 매사의 일을 진심으로, 정직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특기이다. 우리만큼 (우리보다 더...?)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래서 이미 많이 받아버린 둘의 도움을 덥-썩 받겠다고 했다. 막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수진이 다가와 어깨를 톡-쳤다.


“마~ 결혼식 전날에 신부가 햇빛 마사지 좀 받아야지~”

“그래야제~”


부족한 물건을 사러 읍으로 나가는 길에 문자가 띠링띠링 울렸다.

- 민주, 화장실에 손 씻는 비누가 있으면 좋겠어요.

- 화장실 거울도 닦아야겠데이~

- 꽃을 놓을 유리컵이 필요한데, 집에 가서 구해볼게요.


혼자였다면 놓칠 뻔 했던 부분들이 풀 뽑듯 쏙쏙 뽑혀나갔다. 읍내를 다녀온 사이에 제이제이는 목서와 해당화를 시원하게 다듬어주었고, 수진은 바느질로 수를 둔 광목천으로 가족 대기실을 예쁘게 가려주었다. 승일은 나무 판재를 포토존으로 설치하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구원 투수 등장! 승일의 친구들은 전날부터 와서 도와주겠다며 광주에서부터 흔쾌히 달려왔다. 우선 점심을 든든히 먹이고... 흐흐흐... 시~작! 큰 가구들을 창고로 옮기고, 책상 배치도 전부 바꾸고, 삽질도 하고... 아이고야, 일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겠지? 평소 같으면 둘이서 낑낑대며 무리했겠지만, 지금은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하며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는 것이 참 좋았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그냥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는 기분. 어려운 일을 혼자 혹은 둘이서 하려고 했을 때보다 가벼웠다. 무엇이든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맞지만, 모든 일을 나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맞는 말이다. 쉬지도 않고 깔깔대고 아옹다옹하다보니 식장은 우리도 모르게 깔끔해져있었다.


이제 좀 쉬어 볼까나...? 하며 시계를 보는데 아니 벌써 4시라고? 또 다른 구원투수가 올 시간이잖아! 햇빛 마사지를 너~무 과하게 받아서 발개진 얼굴을 조금 식히고, 숙소에 도착한 해즈와 보파를 맞이했다.


“아니 근데, 신부가 결혼식 전 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나 햇빛 마사지 받는 중이야! 하고 대답했더니, 둘은 햇빛만큼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래도 얼른 들어가서 쉬라며, 내일 오면 전부 잘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나의 등을 두드리며 안아줬다. 토닥토닥, 꼬옥- 그 손길이 어찌나 포근하던지. “정말... 너무 든든해...”라는 말이 입에서 또르르 흘러나왔다. 손을 흔들고 건물을 나오다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끼고서 세상 진지하게 숲속 회의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던 때가 생각났다. 재고 따지지 않았던, 대화주제를 고르려고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됐던. 그저 좋고, 재미있고, 네 일을 내 일처럼 겪어주었던 관계들...

정말 새로운 막이 펼쳐지려나보다.

꼬여있던 두 가지의 실을 다시 풀고, 여러 실을 잇고 엮어 하나로 다시 만든 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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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가족 대기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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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필로 슥슥 게시판도 꾸며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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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과 식순 종이도 초록초록한 테이블보 위에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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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요정들은 초를 나무에 걸어두었지
13.jpg 자, 이제 결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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