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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어도

by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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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가늘게 눈을 떠보니 희미한 빛이 창문을 채우고 있었고 시계의 시침은 6에 다다르고 있었다. 가볍게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물을 끓였다. 담요를 두르고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았다. 논밭을 보며 후후 불어 물을 마셨다. 뜨거운 머그컵이 손을 데워주었다. 박새 소리만 들려온다. 물 한 모금에 박새 소리 한 번. 물 한 모금에 이름 모를 새 소리 한 번. 그런데 갑자기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사이렌 소리!


딩-동-댕-도옹- 아아, 마을에서 알려드립니다. 오늘 11시 30분에 공월 마을 국↑사장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같이 갈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11시까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오늘 11시 30분에 공월 마을 국↑사장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마을에 11시까지 모여주시기 댕-도옹-딩-도옹...


지금이 몇 시야? 새벽 6시에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려퍼진 마을 방송이... 우리의 결혼식이라니! 맞아, 나 오늘 결혼하지? 푸하하! 웃음이 마구 새어나와서 자고 있는 승일이를 깨울 뻔 했다. 입을 막고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아침 준비를 했다.


7시가 되자 승일이는 부스스 눈을 비비며 나왔고,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빨간 현관문을 여니 엄마, 아빠, 할머니, 동생 나은이가 새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긴장과 설렘이 일렁이는 눈으로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 우리는 미용실 갈게. 식장에서 만나자~”

엄마는 대회라도 가는 딸에게 응원의 말을 던지는 것 마냥 결연하게 말했다.

“그래그래, 민주야. 좀 있다 보제이~”

아빠와 할머니도 뒤에서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면서 흔들었다. 동생만 잠이 덜 깬 눈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게 빵 먹고 시작할까?”

짝꿍은 오븐에 데운 빵과 커피를 동생은 사과와 땅콩잼을. 사랑하는 두 사람과의 달콤하고 조용한 아침이다.

어제 밤, 동생은 늦은 시각 퇴근을 하고 달려왔다. 화장을 안 한지 어언 10년이 넘어버려서 직접 할 수는 없었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편안한 곳에서 화장을 받고 싶었지만 그 어느 곳도 썩 내키지 않았다. 고민을 듣던 동생은 흔쾌히 자신이 해주겠다고 했다.


“언니, 딱 스킨만 발랐제? 오빠도 화장 할거가?”

동생이 사과를 오물오물 씹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승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자, 이제 나가봐야지? 느긋한 저작 운동을 마무리하고 큰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환한 창 앞에 담요 하나만 두르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얼굴에 촉촉한 것들이 올라왔다. 톡톡- 눈두덩이에 간지러운 것들이 올라왔다. 슥슥- 잠시 멈췄다가 다시 톡톡, 슥슥. 다시 내가 동생의 도화지가 될 줄이야. 어린 시절 둘이서 장난을 치며 놀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동생은 머리도 몇 번이나 혼자 연습했다더니 능숙하게 잡아매주었다. 머리도 한 번에 끝! 소꿉놀이를 더 하고 싶은데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승일이는 빌려온 드레스를 가져왔고, 등 뒤 엉덩이에서부터 신발끝처럼 복잡하게 달린 하얀 끈을 하나하나 매주었다. 이제 진짜... 출발이다! 셋도 아침에 봤던 엄마, 아빠, 할머니처럼 결연한 주먹을 쥐어 보이고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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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국승일 김민주의 혼인 의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에 계신 손님들께서는 이 곳으로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안내드립니다. (...)


다행히 비는 촉촉이 땅만 적시고 멈춰주었다. 두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무에 걸린 하얀 초에 불을 밝힌다. 서로 다른 두 빛이 만나 더욱 크고 환한 빛이 되길 소망하면서.


살래 트리오가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을 연주한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손을 잡고 걸어간다. 천천히 걸으라고 했으니까, 하나아아, 두우우울, 하나아, 두우울... ... 에라잇! 스윙엔 흔들어야 제맛이지! 승일과 나는 재즈 스윙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춘다. 흰 천으로 만든 꽃길 위를 신나게 걸어간다. 신성함과 순수함이 악을 봉인하길 기원하면서.


예나가 만들어준 생화 웨딩 케이크를 자르며 오늘을 축복하고, 혼인 서약서를 낭독한다. 우리의 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증인으로 앉아있다. 따로 또 같이 삶을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진솔한 다짐을 밝힌다.


아빠의 성혼선언문, 아버지의 축사, 친구들의 축가와 연주, 싱얼롱(Sing-along)까지 끝이 났다. 이제 정말 마지막 순서. 기타로 시작! 트럼펫으로 바그너의 축혼행진곡 멜로디가 연주되고, 승일과 나는 다시 꽃길을 되돌아간다. 더욱 신나게, 힘차게, 기쁘게!


식이 끝나자마자 그토록 기다리던 단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비에 젖어도>, 비에 젖어서 좋았다. 이 날 모두에게 내린 축복의 단비는 하나됨의 씨앗을 싹틔웠다.



↘[결혼은 환영] 영상↙

https://youtu.be/hLZ1aDKqf1U?si=tD9Z5jEABSUA-4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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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요정들이 식장을 향기와 색깔로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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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한 비가 멎고 식이 시작됐다. 아! 예식을 올릴 나무는 해당화에서 목서로 바뀌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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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노래 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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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끝날 때 표정이 제일 좋았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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