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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대리 Jan 03. 2019

내 상사는 질문중독입니다

질문하는 상사와 일한다는 것



첫 회사의 기억은 강렬합니다. 환영회 자리에서 맥주 컵 가득 채운 소주를 들이켰고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합니다. 그렇게 몇 잔을 더 비웠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그 분위기에 겁먹었지만 차차 적응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광고회사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입사했다는 사실 만으로 기뻤습니다. 지긋지긋한 취업의 문턱을 넘어섰으니 이제 열심히 일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첫 경쟁 PT에 투입됐습니다. 저와 동기, 선배 한 명과 팀장님 한 분이 한 팀으로 꾸려졌는데 당시 팀장님은 10년 차가 훌쩍 넘는 대선배였습니다. 그는 무척 독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첫 아이디어 회의를 한 날 동기도 저도 무척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회의라기 보단 한 사람의 아이디어를 위해 모인 자리인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한참 팀장님 말을 듣고 있던 저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고 조심스레 그 부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 돌아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넌 뭐 그렇게 질문이 많아.
네가 피티 할 거야? 불러주는 대로 정리만 해.



그 후로도 그 팀장님과 한 팀이 되어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엔 끈질기게 질문했고 그다음엔 납득해보려 애썼으며 마지막엔 그냥 받아 적기만 했습니다. 그가 말한 것 중 한 줄이라도 빼먹으면 그 자리에서 한참 혼이 나야 했고 그가 생각한 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퇴근 시간이 언제가 될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저 스스로도 한심했지만 상황 탓만 했습니다. 그렇게 꼭두각시 같은 1년을 보냈고 운이 좋게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곳의 팀 구성은 첫 회사와 같았습니다. 사원인 저와 대리 둘, 그리고 팀장님이 있었습니다. 구성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까지의 생활과 달라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직까지도 첫 회의 날 팀장님이 하신 말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메모하는 습관 좋네.
내 말을 받아 적는 것도 좋지만
네 생각도 한번 적어보는 게 어때?


한참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던 팀장님은 그대로 받아 적고 있는 제가 조금 이상해 보였던 겁니다. 그나마 악조건에서도 하나 건진 게 있었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아 적는 것 말입니다. 저는 두 번째 회사에서 처음으로 제 아이디어를 단단히 만드는 데 제 습관을 활용했습니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잘 받아 적는 것보다 나의 아이디어를 잘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부턴 질문이 쇄도했습니다. 네 생각을 정리해보라던 팀장님은 매번 가장 낮은 연차인 제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 생각이 아닌 우리 팀 모두의 생각이 반영돼야 제대로 된 기획서라며 몇 번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저는 그게 싫지 않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한 두 번 제 의견을 말하고 나니 어떤 게 더 좋은 아이디어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선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작은 부분조차 허투루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다른 곳으로 이직할 때마다 제가 보는 기준도 이와 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 규모도 연봉 인상률도 중요하지만 제가 가장 위에 두는 기준은 '분위기'입니다. 연차나 나이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저는 그게 팀의 성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어?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봐.
연차가 높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아직도 기획서를 정리할 때면 그때 그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더 또렷이 기억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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