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을 땐 딱 한 곳만 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정말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효율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업무 환경에서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광고 일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보장되지 않자 더 이상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습니다. 그저 그런 아이디어여도 광고주 입맛에 맞으면 그만. 자극적이고 불편한 소재여도 해외 촬영만 나갈 수 있으면 그만. 실제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제 가까이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만큼 편한 곳이 어딨다고.
적당히 아이디어 내고 적당히 포트폴리오 쌓으면 되지.
광고가 뭘 별거니? 어차피 잠깐 소비되고 말 것들이야."
그만두겠다는 말에 돌아온 반응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받아가면 된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광고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환상을 갖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도 없이 사직서를 냈습니다. 광고주 입맛에만 맞춘 광고, 판매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광고. 그건 제가 생각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경험한 게 전부가 아니야.
회사의 문제일 수도 있고 광고주의 문제일 수도 있어.
한 번만 더 경험해봐. 딱 한 곳만 더.
그때도 같은 마음이면 다른 일을 찾아봐도 좋아."
그만두고 일주일쯤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제가 생각한 광고와 진짜 광고는 괴리감이 있는 것 같다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중이라고 했지만 선배는 완강했습니다. 너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고, 재수 없게 안 맞는 회사에 걸린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의욕 없는 저를 다시 업계로 질질 끌고 온 게 그 선배였고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새로운 자리를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같은 광고회사지만 완전히 다른 곳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비슷한 규모에 비슷한 구성이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다시 꿈꿀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이 일을 그만뒀다면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광고는 내 인생 최악의 업계였다고 말하고 다녔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겪은 모든 일들이 이 업계의 공통점이라고, 더 늦게 전에 빨리 다른 길을 찾길 잘했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선배의 말처럼 딱 한 번만, 딱 한 곳만 더 경험해봐야만 합니다. 단지 내가 운이 나빴던 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