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아졌네요. 저는 쌀쌀해진 이맘때쯤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
북적대는 미술관 로비를 지나 표를 내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설렘은 정적으로 바뀐다. 그 순간은 늘 짜릿하다. 소음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 걸린 그림을 보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그곳.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나는 미술관에 간다.
우리는 작품을 앞에 두고 약속이나 한 듯 겨우 닿지 않을 만큼의 정중함을 지킨다. 그 정중함 사이로 겹겹의 시선들이 액자로 향해있다. 고개를 빼고 보는 사람, 좀 더 멀리서 감상하는 사람, 다리를 들고 겨우 틈새로 어떻게든 작품을 느끼려는 사람. 이 사이에 나도 있다. 우리는 말은 나누지 않지만 서로의 열기를 느낀다. 어쩌다 눈빛이 마주치면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깊은 감동을 교환한다. 그리곤 누구는 남아 더 작품을 보고 다른 사람은 발걸음을 돌려 그다음 작품에 몰입한다.
개인적으로 연주회를 다니는 것도 참 좋아하지만 연주회는 에너지가 충분할 때 가는 것을 선호한다.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음악을 마음에 담고 오려면 최대한 집중해서 보고 듣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연주회가 끝나면 청중인 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려 근처에서 와인을 한잔 하면서 그날을 다독이곤 한다.
하지만 미술관은 충전을 하러 가는 편이다. 입장해서 끝나는 시간까지 내가 보고 싶은 만큼 작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품을 마음껏 보고 나면 내가 모르던 어떤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지난 주말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고흐전을 보고 왔다. 이십 대에는 그 특유의 색감에 취해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작품도 좋았지만 고흐와 그의 가족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핏줄.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형. 그를 세상에 있게 한 가족의 사진을 보았다. 고흐와 닮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전시장 초반에 걸려있는 그의 사진을 보며 그의 실체를 실감했다. 그래, 고흐가 살아서 그림을 그렸지. 아니,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었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고뇌를 짊어졌던 화가가 이렇게 생겼구나.
그가 삶에 색을 입혀 다행이다. 이 그림들을 어떻게 끝까지 완성했을까.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서 무심하게 사람들은 맞이하는 그의 사진을 보며 뒤늦은 위로를 전했다.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채워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고흐 덕분에 나는 일상의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고통도 찬란해질 수 있다는 것을.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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