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소설가 26년간 집필한 작품, 토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 요즘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고민이었다. 나 집중력 장애는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요리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정말이지 몰입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박경리 소설가는 무려 26년간 하나의 작품만 창작했다. 그게 바로 토지이다. 토지는 현대문학에서 연재되어 왔는데 그 기간 동안 작가는 오로지 글을 쓰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토지라는 작품은 요즘 유행을 좇는 흔하디 흔한 '베스트셀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작품은 대중에게 관심받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박경리 작가는 토지라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자기 확신'이 필요했겠다.
누군가가 시켜서 해낸 일도 아니었으며 스스로가 그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를 떠올려보자. 그러면 박경리 소설가의 토지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와우. 그럼 박경리 작가는 어떻게 토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토지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준 작품의 영감을 믿음사 인터뷰에서 밝혔다.
"어느 시골에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있어 풍년이 들어 곡식이 무르익었는데도 호열자가 나돌아 그것을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벼가 누렇게 익었는데 마을은 텅 빈 그런 풍경이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할까. 그 뒤 문단에 나와 작품을 쓰다가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그때부터 그것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감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사소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에서 오히려 잘 드러났다. 사실 토지 1부가 나오기 이전까지도 그녀의 작품은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글에 가까웠다. 그러나 토지 1부가 출간되면서부터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로서 인정을 받는 주요한 작품이 되었다. 토지는 그 뒤로 방송국 kbs에서도 드라마로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 뒤로 5부까지 글의 연재는 계속되고 박경리 작가는 쉴 틈 없이 창작에 매진해왔다.
무려 26년간 글을 쓰면서 사회는 빠르게 바뀌었다. 작가는 중견 작가에서 원로작가 되었고 토지는 한국 문학에 남을 대서사시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지나온 삶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박경리의 토지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얼굴이 된 것이다.
"저는 원고지를 메울 때마다 언어가 도망가는 것을 봅니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감동을 글로 옮기려고 하면 그것이 저만큼 달아나 버립니다. 그 달아나는 말들을 붙들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씁니다." - 1966년 박경리의 말
박경리 작가가 매일 해오던 습관과 일상 속에서. 그리고 박경리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그녀의 익숙하고 친근한 얼굴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암수술을 받고 보름 만에 퇴원한 강한 사람으로. 푸르고 싱싱한 채소와 밭을 가꾸는 정이 많은 농부로.
그녀의 이름이 한국 근대 문학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심이 담긴 내용과 치열한 그녀의 삶이 생생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작가를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 작가를 기념하는 장소를 찾아봤다. 바로 토지문화관이다. 날씨가 좋은 요즘 산책가기 좋은 곳. 나들이 가기 딱이다. 토지문화관에 가면 그녀의 모습과 그녀가 생전에 아끼던 고양이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 찾아가도 항상 박경리 소설가와 작품은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설렜다. 겨울이 지나면 항상 봄이 오는 것처럼 오래도록 기억되고 우리들 곁에 남을 그녀의 토지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나의 마음 속으로 찾아올 것이다. 아직도 박경리 작가는 우리들 곁에서 어제와 내일이 함께 이어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Instagram @helloreade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