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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네덜란드 2_ 알크마르, 헤이그, 킨더다이크

독립운동가 이준 열사 기념관은 네덜란드를 여행하면  꼭 가봐야 할 곳

숙소 -> 알크마르 치즈시장 ->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 킨더다이크 -> 숙소(암스테르담)

네덜란드에서의 이튿날은 바빴다.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었고, 그 외에 가고 싶은 곳들을 몇 곳 정해놓고 체력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다녔다.


남자 어르신인 사장님이 직접 해주신 너무 맛있었던 한식

집 떠나 10일쯤 되었나. 맛있는 한식이 당길 때였는데, 이 욕구를 이날 아침에 해결했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고 노릇노릇한 하얀 쌀밥부터 시작해, 직접 재배하신 야채들의 반찬도 하나같이 싱싱하고 간도 훌륭한 식사. 그뿐인가? 구수하고 그리 짜지 않은 된장에 폭폭 삶은 두부가 잘 어우러진, 정석 같은 칼칼한 된장찌개. 이 모든 게 어우러진 한식의 만찬! 너무 맛있어서 사장님께 너무 자연스럽게 "사장님, 밥 한 공기 더 주세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사모님께선 아침을 다 먹은 여행자들에게 필요하시면 가져가라고 소금과 함께 싸주신 삶은 달걀도 기억난다. 정이 많으신 사모님은 여행자들에게 이리저리 신경 써주셨었다. 내가 지금보다 글 표현력이 한참 서툴렀던 그때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음에도, 후기를 보고 간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맛있다고 인증해주시곤 했다. 문득, 사장님 부부분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아침을 두 공기 넘게 먹고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첫 행선지는 알크마르로, 민박에 있던 동갑내기 쌍둥이 두 친구 그리고 한 여동생과 동행하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매주 이날만 열리는 세계적인 치즈시장이 그곳에서 열린다고 했기에. 이런 것은 안 볼 수가 없지.

무언가 열심히 나눠주던 소녀. 네덜란드인은 키가 컸다. 무조건이다
숙소에서 1시간이 넘어 알크마르 역에 도착
알크마르 [ Alkmaar ]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에 있는 도시. 1573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스페인군은 운하로 둘러싸인 알크마르를 끝내 공략하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가 깃든 알크마르 거리에는 14~15세기에 세워진 옛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알크마르의 명물인 치즈 시장은 4월 중순~9월 중순 금요일 오전 10시~12시에 시내 중심가인 바흐 광장에서 열린다. 하루 평균 30만kg의 치즈가 거래된다.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치즈를 거래하고, 들것에 매고 다니는 상인들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근처의 맥주 박물관에 있는 바에서 네덜란드의 지역 맥주도 맛볼 수 있다. 광장 한쪽에는 14세기에 세워진 예배당을 1580년 개조한 계량소가 자리한다. 1층의 계랑소&치즈박물관(Wagg Kass Museum)에서 전통적인 치즈와 버터 제조법, 현대 치즈 산업에 관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스타티온 거리(Stationstraat)에서 운하를 따라 나와 베르허르 다리(Bergerbrug)를 건너면 도보 10분 거리에 성 라우런스 교회(Grote of St. Laurenskerk)가 나온다. 1470~1516년에 걸쳐 세워진 브라반트 고딕 양식의 교회로, 1520년에는 홀란트 백작 플로리스 5세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오르간(1511년), 암스테르담 왕궁을 지은 반 캄펀이 설계한 오르간(1645년) 등이 볼거리다. 치즈 시장이 서는 날에는 콘서트도 열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크마르 [Alkmaar Cheese Market]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내 중심가인 바흐 광장까지 조금 걸어가니, 이런 재미있는 광경이 보였다.

보기만해도 일단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저 많은 게 실제 치즈라고 한다. 하루 평균 30만kg의 치즈를 거래한다니...

실제 치즈 상인들의 모습

이 모습은 실제로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 논의를 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보고 있지만 7월 말 한여름의 더위에 전통 복장인 하얀 긴팔 셔츠와 멜빵에 모자를 쓰고, 본연의 일의 열심인 모습. 이 와중에도 밝게 웃으면서 일을 즐기는 모습은 관광객들에게 긍정성과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치즈 운반대에 치즈를 운반할 때, 키가 큰 그들이 저렇게 하는 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위트로 다가왔다. 덥고 무거울 텐데, 그들은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보는 관광객 대다수는 다들 웃고 있었고, 치즈가 떨어졌을 때는 안타까움에 같이 탄식을 해주기도 했다. 앞에 섹스박물관 사례에서도 적었지만, 이것마저 위트를 더해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행사로 '상품화'한 것은 분명 '네덜란드의 상인 정신'으로서 배울 점이 아닐까 싶었다.


키 190cm 이상은 되는 분들이 "헛둘헛둘" 하면서 치즈를 운반했던 모습
그리곤 옆에 이렇게 치즈를 사갈 수 있게 한다. 한 조각 사서 먹었는데, 좀 짰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체험형 매장은 이미, 알크마르 치즈시장에서 하고 있었던 것.


치즈시장 관람 후엔, 주변 시내를 조금 둘러보았다.

운하, 과일 그리고 꽃은 네덜란드의 상징인 듯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일정이 다른 세 친구와는 서로 안전여행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제, 계획한 대로 헤이그(Den Haag) 시로 가기로 했다.

좌 - 네덜란드의 열차 / 우 - 헤이그 중앙역
헤이그 [ Hague ]
네덜란드의 서부에 있는 네덜란드 정부기관 소재지이며, 조이트홀란트주(州)의 주도(州都).
스흐라벤하허(s-Gravenhage)라 한다. 네덜란드의 정식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나 실질적인 수도는 헤이그이며 정치의 중심지이다. 1248년 홀란트 백작가의 빌럼 2세가 성관(城館)을 구축한 것이 도시의 시초이다. 16세기에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성립되고 1618년 마우리츠 총통이 거성(居城)으로 삼은 이래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상공업도시가 아니었으므로 도시 자치의 성립이 뒤늦어, 나폴레옹 시대의 네덜란드왕 루이 보나파르트 때에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많은 국제회의가 열린 곳으로 1899년과 1907년에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1913년에 세워진 평화궁에는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상설중재재판소가 설치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 로켓탄의 발사 기지가 되었고, 연합국측으로부터도 많은 손해를 입었으나 지금은 ‘유럽 최고의 마을’을 자칭하는 나무가 많은 공원도시로 복원되었다. 시의 중앙에 있는 비넨호프(궁전의 內殿을 뜻함)에는 국회의사당·기사당(騎士堂:매년 9월 암스테르담으로부터 여왕이 참석하여 개원식을 거행하는 건물로 1250년에 건설되었음)이 있으며, 인접해 있는 국립미술관 마우리초이스에는 R.렘브란트(해부도), J.V.페르메르(터번을 쓴 소녀), P.포터(황소), P.P.루벤스, F.할스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근대 회화를 다수 소장한 시립박물관, 미니어처 도시 마드로담, 감옥박물관(여기에서 위트 형제 등 유명한 정치가들이 처형되었다), 스켈베닝겐 해안 등 볼 만한 곳이 많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 때 한국에서는 고종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은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3인이 헤이그를 방문,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성을 천명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훼방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이준 열사는 순국하였다. 유해도 오랫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었으나 1963년에 환국, 서울 수유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이그 [Hague] (두산백과)

역에서 내려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걸어가다, 배가 고파 벤치에 앉아 사모님이 싸주신 달걀을 꺼냈다. 달걀, 그것도 완전식품인 삶은 달걀은 정말 든든한데, 배고파질 점심 즈음에 참 잘 먹었었다.


이준 열사 기념관. 가슴이 뜨거워졌던 그 순간
이곳에선 특히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이준 (독립운동가) ]
출생 - 사망: 1859.1.21. ~ 1907.7.14.
약력
1896. 독립협회 평의원
1904. 공진회 회장
1906.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1907. 헤이그 순국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선생의 유훈 중에서-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다
이준(李儁, 1859. 1. 21~1907. 7. 14)선생은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공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 마저 별세하여 졸지에 고아가 되었으나,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 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하고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폐하다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상설, 송수만, 원세성 등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조직, 격렬한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 이상재와 함께 연설과 웅변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의 성격을 띤 대한협동회를 조직, 그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은 선생이 총무는 정운복, 평의장은 이상재, 선무부장은 이동휘, 편집부장은 이승만,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위 등이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8월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 분자들로 하여금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12월 12일 선생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열사는 회장으로서 반(反)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황해도 황주 철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동년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소위 을사오조약의 늑결을 강행하였다는 것, 이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고 중국 상해에서 즉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을사조약에 대한 폐기를 상소하는 운동을 펼치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기울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3월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선생은 이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안창호, 김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헤이그에 특파되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선생은 주위 도움을 받고 비밀리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다.

선생보다 먼저 출발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러시아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여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만났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전이 박탈당하였으나 세계정세를 관망하기 위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다. 한편 선생은 1907년 4월 22일 가족들과의 고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울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으며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6월 4일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한 선생과 이상설은 이범진, 이위종을 만나 그간의 경과에 대하여 토론하며 [장서]의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번역한 후 6월 19일 그곳을 출발하여 독일 베를린에 들려 [장서]를 인쇄하고 동월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De 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다.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Nelidov)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아 거절당하고 말았다.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다. 당시 참가국은 46개국이고 대표는 약 247명이었다. 이상설을 비롯한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 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이위종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선생은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55년만에 밟은 고국의 땅
선생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을 윤병구 목사와 선생의 동생인 이운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인 동년 9월 5일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75센트를 지불하고 Nieuw Eiken Duinen 묘지를 영구 사용의 계약을 하고 다음 날인 9월 6일 장례식을 치렀다. 열사의 장례에 대하여 당시 <학세 쿠란트(Haggsche courant)> 7522호의 기사에 의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유해는 에이켄무이넬에 완전히 매장되었다. 장례식에는 한국 대표 단 두 사람과 YMCA의 회장 매케이 남작이 참례했다. 이상설은 이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가셨다’고 슬픈 조상을 했다.” <학세 쿠란트(7522호)>

동년 8월 9일 일제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을 하여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선생은 종범으로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에 조국의 품 안으로 모셔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하였다. 1964년에는 서울 장충단 공원에 열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헤이그 묘소에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준 [李儁] - 헤이그 밀사로 특파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마침 어제가 제76주년 대한민국 815 광복절이었다. 나라를 위해 애써주신 독립운동가 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준 열사 역시 헤이그 특사로 알려져 있는데, 이 분들에 대한 노고는 늘 기려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직원분께 이준 열사 및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특히 그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보통 한국인 분들은 암스테르담만 잠깐 거쳤다 가시는 것 같아요. 여기에도 들러주시면 참 좋겠는데..."
맞는 말씀이었다. 내가 유럽 여행을 할 당시, 이후에도 헤이그에 간다고 한 사람은 거의 듣질 못한 거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각으로 이런 분들을 기리고 잊지 않는 게 아닐까. 아무튼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유럽 대륙을 밟으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분들이 노력해주셨기에 가능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있는데, 가족으로 보이며 3분을 데리고 오신 한 형님께서 나에게 인사를 해주시며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물어주셨다. 정한 곳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킨더다이크로 갈 건데 차로 동행하면 어떠겠냐시면서. 킨더다이크도 풍차마을인데 크기가 크며, 웅장한 멋이 잔세스칸스와는 다른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괜찮겠다 싶어 제안에 감사하며 따라가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갑자기 유쾌한 일정이 새로 추가되었다.



표지판마저 위트있다니!

로테르담 시 근교에 있는 킨더다이크까지는 승용차로 1시간 반 정도. 부모님, 남자아이 둘의 이 가족은 한국에서 오셨고, 차를 렌트해 3달 정도로 계획해 유럽을 여행하고 있다고 하셨다. 행복한 가족이었고, 혼자 여행하는 내게 흔쾌히 제안해주신 게 참 감사했다. 당시 두 아이가 11, 15살이라고 기억하는데 참 부러웠다. 지금은 많이 컸을 텐데, 행복한 추억으로 가지고 있겠지. 시간이 좀 지난 지금, 훗날 나도 가정을 꾸리고 미래의 아내와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디론가 또 떠날 수 있는 준비도 해둬야겠다.

마을 호수에서 수영하던 주민들
킨더다이크 공원 [ Discover Kinderdijk Park ]
위치: 네덜란드 로테르담 근교

킨더다이크 공원은 플랑드르 화파 거장의 캔버스화에나 등장할 법한 고전적인 네덜란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로테르담에서 16㎞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곳에는 운하 제방 위에 170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풍차가 19개나 남아 있다. 네덜란드에서 옛 풍차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네덜란드는 국토 대부분이 해수면과 같거나 낮기 때문에 언제나 홍수가 큰 골칫거리였다.

이 풍차들은 200년 넘게 알블라서바르드(Alblasserwaard) 해안 간척지의 물을 빼내 주변 지역에 홍수가 나지 않도록 해왔다. 만약 9월 둘째 주에 방문한다면, 풍차에 야간 조명을 비춰 더욱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또 7~8월 중 토요일에는 19개의 풍차 모두를 가동시킨다. 아름답게 복원한 풍차 중에서 일반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얼마 되지 않는 입장료를 내면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층마다 올라가며 방앗간 주인 가족의 비좁은 주거 공간을 엿볼 수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풍차의 날개를 보면 왠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머리를 부딪힐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고로 목이 날아가지 않도록 특수하게 설계되었으니 말이다. 운하 제방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겨울에는 얼어붙은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좀더 정적인 휴가를 원한다면 보트를 타고 유리 같은 수면 위로 미끄러져 가거나 산책로를 따라 거닐면서 이 고요한 지역의 평화를 만끽할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킨더다이크 공원 [Discover Kinderdijk Park]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휴양지 1001, 2011. 1. 7., 헬렌 아놀드, 박누리)
여기가 킨더다이크구나!

미니어처 같은, 잔세스칸스 마을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심신이 청량해지면서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화목하게 사실 가족분들. 건강하세요!!

킨더다이크를 둘러본 후, 날 인근 기차역까지 태워주신 배려도 잊지 않으셨다. 난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고 나에게 가족의 본보기, 그리고 동행으로 초대하는 베풂을 주신 이 가족분의 안부도 문득 궁금하다. 이후 덴마크로 넘어가신다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귀국하셨겠지. 연락이 닿으면, 안부를 여쭙고도 싶다.


다시 암스테르담 역으로 돌아와, 숙소로 들어가는 길

무슨 역에서 타고 돌아갔는지는 사진도 안 찍었고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유레일 기차역이면 유레일패스를 써서 다 타고 갈 수 있다. 지금은 어플로 확인하면서 시간표를 보고 탈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로테르담 근처 역이었을 텐데 돌아가는 길이 2시간이 넘을 정도로 길었고 피곤해선지 이따금 졸았던 거 같다. 이럴 때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둘 이상 여행하는 게 가장 좋긴 하다. 번갈아가면서 자고 깨우고 할 수도 있으니.

그날 늦은 저녁은 간단히 버거와 맥주로 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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