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깨어나다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 갈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을 위해 여름방학 동안 제주도 2주살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 친구네와 함께하는 여정이라 나만을 위한 일정을 넣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있었다.
내 안에 ‘애마인’이 깨어나니 용기가 생겼다. 아니, 무조건 가야 했다. 아이 친구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문하는 일정을 추가했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2주 동안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8월 16일. 그날이 왔다. 말들에게 줄 당근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말을 본 것이 언제였지?’ 오랜만에 그리운 연인을 만나는 듯한 설렘에 마음도 몸도 조급해졌다. 도로를 지나 비포장도로 산길을 달리다 보니 출입문 같은 곳이 보였다. 작은 건물과 말들이 보였다.
처음 만났지만 익숙한 얼굴의 남훈 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말들이 당근 냄새를 맡고 하나둘 몰려들었다. 남훈 씨가 가방에서 당근을 빼서 나무 위에 매달아 두자, 그 많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남훈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상 속에 나왔었던 야생마 모녀가 말구조보호센터에 합류되어 잘 지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센터의 말들 우두머리인 모히칸도 소개해 주셨다. 모히칸은 무리를 지키는 우두머리답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조랑말이라 체구가 작은 편이지만 그 기세만큼은 큰 수입마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모히칸이 야생마였던 시절, 처음 올라타셨던 영상도 보여주셨다. 등에 올라탄 낯선 존재를 떨어내려는 모히칸의 몸동작은 야생 그 자체였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함께 하고 싶다는 듯 자꾸 끼어드는 말이 있었다. 남훈 씨가 밀어내도 어느새 다시 와 있었다. 반가워서 목을 긁어주고 쇠파리를 쫓아주며 인사를 건넸다. 긁어주는 것이 시원했는지 내 옆에 붙어서 나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말의 따뜻한 체온과 단단한 피부의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위해 파리를 쫓아주는 것을 아는지 연신 자기 몸 주변으로 손을 휘젓고 있는데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말은 겁이 많아서 사람의 작은 동작에도 놀라는 경우가 있다) 처음 만난 나를 믿어주는 그 녀석이 너무나 고마웠다. 다시 방문했을 때 운명처럼 서로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남훈 씨는 아이들을 말 위에 태워주셨다. 안장도 없이 올라타는 영광이라니. (나에게 있어 안장 없이 올라타는 것은 말과의 교감 단계 최상위를 뜻한다) 딸이 부러웠다. 하지만 딸은 낯선 높이에 놀랐는지 울먹이는 바람에 금세 내려와야 했다. ‘그 영광을 뿌리치다니.’ 나만 속상할 뿐이었다. 함께 있던 오빠가 씩씩하게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다시 올라간 딸에게 남훈 씨가 말했다. “말의 체온이 느껴지니? 따뜻하지?” 이젠 익숙해졌는지 딸이 씩씩하게 대답한다. “네!”
‘나도 느껴보고 싶다고.’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내뱉을 뿐이었다.
말들에게 직접 줄 거라는 기대로 준비해 간 당근은 말들이 몰려든다는 이유로 결국 바닥에 뿌려졌다. 당근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한 시간 남짓한 만남도 마무리가 되었다.
남훈 씨는 마지막에 계획하고 있는 센터의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해 알려주셨다. 말과 후원을 통한 결연을 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 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반려마의 꿈. 드디어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제주도에서 살면 자주 올 텐데.’
‘제주도에 살면서 여기 말들과 친해지고 싶다.’
‘열심히 봉사도 할 자신이 있는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에 떠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속에서 또 다른 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말의 이야기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