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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Oct 21. 2024

현관문 30M 앞, 지하철 소음으로 매일이 시끄러운 집

평일에는 2~3분, 주말에는 4~5분 간격으로 지하철이 지나다닌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서울의 중심부를 순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유독 신도림역과 신림역 사이의 구간은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달린다. 우리집은 바로 지하철이 아닌 지상철이 다니는 구간 30M 바로 옆에 있는데, 현관문이나 창문을 열면 바로 지하철이 평행으로 달리는 게 내다 보인다.


2호선의 첫 차는 대략 05시 39분, 막차는 00시 58분에 있다. 5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내내 지상철이 다닌다. 게다가 배차 간격은 평일에는 2~3분, 주말에는 4~5분이다. 신도림역으로 가는 방향의 차도 있지만, 신림역 방향으로 가는 차도 있다. 2개의 차량이 왔다갔다 하다보니 체감하는 배차 간격은 훨씬 작다. 그야 말로 내내 지하철이 다니는 셈.


처음에 신혼집으로 계약을 했을 때는 기쁜 마음에 잘 몰랐는데, 입주 전에 몇 번 가보니까 지하철 소음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놀랐고 걱정했던 게 기억난다. 전 집주인에게 "그래도 현관문 앞에 중문 달고 하면 소음이 심각하지는 않죠."라고 물어봤더니, "아니요... 소음은 꽤..."라고 하는 대답에 우리가 더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참, 베란다 쪽으로는 비행기도 체감 상 5분~10분 간격으로 날아다닌다. 자동차에 오토바이, 지하철, 비행기까지... 여러모로 시끄러운 것들은 모두 모여있는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몇 개월은 스트레스도 좀 받고 신경도 쓰여서 복도에 소음방지 창문을 달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소음방지 창문을 달려면 해당 층이 모두 합의를 해야 한다는데, 합의도 쉽지 않고 비용도 비용이라 그냥 생각만 하고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집 복도에 들어서면 쿵쾅쿵쾅, 창문을 열면 쿵쾅쿵쾅. 내 마음도 그에 따라 쿵쾅쿵쾅 하는 것 같았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정말 천장이 무너진다거나, 화장실이 없다거나, 보일러가 매번 터져서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안고 자야 한다거나, 방음이 아예 안된다거나 하는 집에 주로 살았기 때문인지 정상적인 집처럼 생긴 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그런데, 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그 다음부터는 부족한 것, 불편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행복에도 약간은 금이 갔던 것 같다.


이 집을 선택하는 게 맞았을까, 꼭 이 집이었을까 하는 생각과 후회도 몇 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알아봤더라도 내가 이 집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 약간은 불행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데, 또 몇 개월 지나니 그렇게 신경 쓰였던 소음도 익숙해졌다. 내가 정말 익숙해져서인지, 중문의 효과인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우리집 옆에는 지상철이 지나간다"는 생각을 안 하면 들리지 않는다. 보통은 생활소음이나 TV소리 등에도 묻혀버린다.


그런데, 신기하게 "우리집 옆에는 지상철이 지나간다"는 의식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 소리가 다른 소리들을 뚫고 들어와서 내 귀에 들린다.


심리학에 "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때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들어오지만 사람은 이 많은 정보를 다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우리가 듣고 싶은 내용의 한 가지 대화만을 집중해서 듣게되고 나머지 소리는 잡음이나 배경소리 처럼 들린다고 한다. 아주 시끄러운 와중에도 누가 내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또렷하게 들리는 것과 비슷하다.


소음은 그 자체로 소음이고 내가 신경을 쓴다고 들리고, 신경을 안 쓴다고 안 들리지 않을 거 같은데 "칵테일 효과"처럼 감각기관도 어느 정도는 제어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지금도 지하철 소리는 크고 쿵쾅쿵쾅 거리는데, 이제는 너무도 당연해서 인지 소음이라기 보다는 그냥 하나의 소리로 인식될 뿐이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해왔던 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중증근무력증이 처음 있다고 들었을 때는 병 그 자체가 아주 큰 소음이자 굉음으로 느껴졌다. 그 자체를 듣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쿵쾅쿵쾅 하게 만드는 것. 생각만 해도 너무 불편하고 열이 나는데, 매일 우리집 앞을 2~3분 단위로 왔다갔다 하는 지상철들의 소음처럼 내 머릿 속과 마음 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는데, 우리 집이라서 내 몸이라서 도망갈 곳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역시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는지,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처음부터 내 몸에 붙어있었던 냥, 원래 그렇게 살아온 마냥 지금은 받아들이는 게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마음이 든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머리와 마음 속은 매일이 전쟁 같았고, 또 앞으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생각해 본다. 그냥 우리집 앞에 지하철이 지나간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병이 있다고 너무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날 너무 괴롭히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냥 원래부터 있었던 동료처럼, 내가 너무 문제 삼지 않는다면 딱 그 정도의 문제로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병이 온 것은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다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마음 먹기 뿐이다. 병이 생기고 나서는 더 극단의 긍정적인 마음과 더 극단의 부정적인 마음이 공존한다. 딱히, 긍정적인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부정적인 것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나로서는 두 마음이 극단으로 왔다갔다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더 익숙해져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체로키 인디언의 전설의 늑대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우리 마음 속에는 아주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동시에 존재해 있다고 한다." 손주는 묻는다. "그럼,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병에 대해 부정적인 것도 나이고, 긍정적인 것도 나의 모습이다. 다만, 앞으로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줄 것이냐는 나의 선택이고, 나와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긍정적인 늑대에게 조금씩 더 마음과 먹이를 내어줄 셈이다. 그러다 보면 언제부터인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 다음에는 아예 없는 것처럼, 또 그 다음에는 오히려 감사한 계기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마음으로 생각하면 우리 집 앞 30M에서 매일 지나다니는 지상철 마저도 의외의 장점들이 많다. 일단, 자주 들으면 정말 ASMR처럼 들린다. 나를 포함해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작업에 집중할 때, 백색 소음을 유튜브에서 틀어놓는데 광고가 필요없는 백색소음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더 글을 쓸 때, 지상철 소리가 들리는 작은 방에 들어와서 글을 쓸 때가 많다.


지상철이 지나다니는 덕분에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시야가 확 트여있고, 나름 야경이 나쁘지 않다. 여의도 불꽃 축제를 하는 날이면 멀리서 불꽃이 보이기도 한다.



또, 생각해보면 지상철이 지나다니지 않았다면 지금 집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음이 없었다면 이만한 가격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만한 가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서울에서 나의 선택지가 사실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가격에 여기에서 살게 된 건 오히려 지상철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우리 아들이 지상철을 너무 사랑한다. 지상철은 우리 아들에게 "칙칙폭폭이"이다.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출근하기 전에 함께 서서 바라보는 것. 아들이 너무 울 때, 현관문을 바로 열고 나가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게 해주는 감사한 것. 아들이 너무 심심할 때,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게 해주는 감사한 것이다.



아들들은 특히 자동차, 버스, 기차, 비행기 탈 것들을 유난히 좋아한다. 어른들에게는 온갖 교통수단이 난무하는 소음의 동네, 현관문 30M 앞 지하철 소음으로 매일이 시끄러운 동네이지만, 아들에게는 매일 5분 간격으로 기차가 다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동네이다.


같은 사물도, 같은 동네도 바라보는 사람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의 병도 그러할 것이다. 무조건 나쁘기만 할 리가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또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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