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19. 2022

세 가지 마법과 노팅힐

생각하면 현실이 된다 

세 가지 마법과 만나다 

전날 밤에 러셀 크로우 역에서 15층 높이의 계단 175개를 걸어 올라왔다. 비상시에만 올라가라는 안내문을 못 본 탓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그 길로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오후 1시가 넘어있었다. 자고 또 자도 눈이 떠지지 않을 만큼 피곤한 것이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더 쉬고 싶었지만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미역국’이었다. 갑자기 왜 미역국이 먹고 싶은지 모르겠고; 런던에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놀랍게도 잠시 전에 먹고 싶다 소원했던 미역국을 만났다. 연어 도시락에 곁들인 것이었는데 런던에 오면 먹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미역이 담겨 나오긴 처음인 것 같았다. 사실 미역국을 먹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라고 말했지만 믿지 않았었다.  첫 번째 마법이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은 거기에 끝나지 않았다. 폭풍흡입을 하고 어제보다 햇살이 좋은 나른한 오후를 즐기려고 어슬렁어슬렁 공원과 주변을 산책하듯이 걸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우연히 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러셀 크로우’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속으로 동공 지진이 일었다.  점점 내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 거지? 닮아도 너무 닮았다며 힐끔거리는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다. 아, 이럴 때 인증 사진을 남겨야 하는데;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지만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 이상한 사건에서 물론 그가 영화배우가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 혹은 이미지가 지나가고 그리고 현실에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개트윅 공항에서도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두 번째 마법이 나타났다.  



오늘은 정말 걷기 싫은 나를 대신해서 어디든 데려다 줄 버스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별생각 없이 아무 버스나 탔다.  그러다 문득 ‘소호’에 가서 긴 팔 옷을 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나 세상에! 이럴 수가! 잠깐만요.

그리고 잠시 후에 버스가 회전 교차로를 한 바퀴 돌더니 심상찮은 거리가 나왔고 곧 ‘소호’ 거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른 버스에서 내렸다. 소호에 대해서는 중저가 괜찮은 상품들이 많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쇼핑을 해본 적은 없었다. 활짝 열린 문은 환영한다고 하는 것 같아서 용감하게 들어갔다. 색감과 디자인이 화려한 옷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아래층을 쓰윽 보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옷 하나를 집었다. 앰브리엘 칼라로 된 시폰 오픈형 원피스였는데 입어보니 안정감이 들었다. 나에게 필요한 에너지인가 보다. 소호에 가면 좋겠다 했는데 소호에 가게 된 그것은 그날 내가 경험한 세 번째 마법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마법 같은 일은 그동안 훈련했던 '좋은 느낌 16초'가 가져온 초현실적 현상인 끌어당김의 법칙과 상관이 있어 보였다. 생각하면 현실이 된다는 그 마법의 힘 말이다. 


새 옷을 입고 나니 힘이 나면서 불현듯 노팅힐(NotingHill)에 당장 가보고 싶어졌다. 



Surreal but nice. 초현실적이지만 좋아요


노팅힐은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다. 그녀는 유명한 할리우드 여자 배우 ‘애나 스콧’으로 나오고 눈꺼풀이 심하게 내려앉은 남자 휴 그랜트는 윌리엄 대커로 나온다. 그는 소심한 보통사람으로 노팅힐에서 여행전문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의 일상에 어느 날 홀연히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 애나가 서점을 찾아온다. 영국과 미국이라는 지역성을 배제하고도 배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이뤄내는 사랑의 결실은 사람들의 가슴 한쪽에 남아있는 로망이라는 공감대를 만들고, 도저히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극적 전개가 인상적으로 펼쳐지면서 결과적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 로맨틱 영화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를 설레게 한다. 나는 영화의 배경지를 노팅힐로 한 이유를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노팅힐(NotingHill) 지역 소개 

노팅힐(Notting Hill)은 우리들에게 영화 촬영지로 기억되지만 영국인들에게는 연례 축제 행사인 카니발(융합 축제)과 포토벨로 로드 시장(포토 밸로 마켓(Portbello Market))의 발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귀족의 마구간과 하인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을 때 수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이곳으로 유입되었다. 브라질 사람들 중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노예들과 고용한 하인들이 해방되면서 이민자들의 거주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일부 특권의식을 가진 귀족층은 이들을 비하했고 결국 큰 폭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인종과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등장한 것이 바로 카니발 축제다.  그리고 화합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이곳 노팅힐을 크게 성장시켜 런던에서 가장 매력적인 지역 중 한 곳으로 만들었다. 노팅힐 영화는 이런 지역적 배경과 맞닿아있다. 신분의 차이, 국적과 직업의 차이를 뛰어넘어 결합된 주인공들이 노팅힐에서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다. 


노팅힐(Noting-Hill)은 달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더없이 적절해 보였다. 입구부터 옛날 카우보이들이 나올 법한 고전적인 모습이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서민적인 풍경들과 함께 아기자기한 물건부터 오래된 골동품들까지 취급하는 빈티지 가게들이 줄지어선 포토벨로 로드(Portobello Road)는 정말 이색적이었다. 



무엇보다 무지개를 펼쳐 논 것처럼 다채로운 파스텔 톤의 옷을 입은 주택들은 걷기만 해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사실, 노팅힐(Noting-Hill)이 유명해진 것은 파스텔 톤 주택들의 사진이 인스타 그램에 등장하면서 런던 전역의 사진작가들을 자극했고, 그들이 올린 사진들이 앞 다투어 올라오면서 노팅힐을 런던에서 가장 낭만적인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면서부터다. 



현지인의 생생한 삶이 담긴 리얼 시장 포토벨로(Portobello)는 음식, 패션 액세서리, 생활 잡화, 의류 및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판매하고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빈티지한 느낌과 고급스러운 느낌이 서로 묘하게 믹싱 되어 있는 상품을 가득 진열해 놓은 손수레의 행렬은 무척 특이했는데 무려 토요일에는 2킬로가 된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체리를 실은 손수레 앞에 멈췄다. 짙은 와인 빛 체리가 어찌나 나를 유혹하는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현금이 없어 카드를 주었는데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웬만하면 귀찮아서 포기했을 텐데, 못 먹으면 너무 후회될 것 같은 마음이 솟구쳐서 얼른 ‘ATM’ 기로 뛰어가 파운드를 인출했는데 정말 흔하지 않은 행동이다. 짙은 와인 빛의 체리는 금방이라도 내 심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 같았다. 씻지도 않은 채로 휴지로 닦아가면서 체리를 먹으며 길을 걸었다. 정말 행복했다. 


그래, 진짜 여행은 이렇게 어슬렁거리면서 먹고 싶은 것 입에 물고서 걷다가 서다가 하면서 누리는 거다. 


혹시 모퉁이를 돌면 노팅힐 서점에서 나오는 윌리엄과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점원은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지만 노팅힐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어서 반가웠다.   




Surreal but nice. 초현실적이지만 좋아요

이 표현은 영화 속에서 윌리엄 데커가 애나 스콧의 기습적인 입맞춤을 받은 뒤 한 말이다. 오늘 내가 경험하게 되는 세 가지 매직에 대해서 나도 이 말로 대신하고 싶다. 믿어지지 않지만 좋아요.라고^^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나왔더니 런던을 기피했던 진짜 숨겨진 편견의 벽 하나가 해체되었다. 알고 보니 영국인들은 콧대가 높지도 않았고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영국은 영국이고, 런던은 런던일 뿐인데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지레 겁먹고 피했던 것이었다. 전환기에 귀족층과 평민층이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대립했던 것처럼. 


별걸 다 만들어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힌 것이었다.









이전 09화 영국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