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 아를(Arles)의 아픔
드디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숨결이 있는
빛의 도시 아를(Arles)로 가는 날
아직 어스름이 남아있는 파리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캐리어가 바닥에 끌리면서 내는 드르륵 소리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전철역(Crimée)에 도착했다. 시간에 늦지는 않을까 전철에서 헤매지는 않을까 염려하던 차에 우연히 입구에서 한 신사(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리옹(Gare-Lyon)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되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아를에 간다고 했더니 그도 어딘가를 간다고 하는데, 발음이 너무 독특해서 알아듣지를 못했다. 갸우뚱거리니 한 번 더 이름을 말하는데, ‘막생’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목구멍에서부터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말아서 뱉어내듯이 발음을 했는데 완전 본토 발음인 듯했다. 그곳이 어디냐 물으니, 어떻게 막생을 모를 수 있느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침 튀어나올 만큼 자랑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도시이고 가장 유명한 도시다.
그곳을 가보지 않고는 프랑스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게 그곳이 어디일까
알고 보니 바로 ‘마르세유(Marseille)’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특이한 발음과 강렬한 출신 도시에 대한 스피치 덕분에 다채로운 문화가 혼재된 거대한 항구도시 마르세유가 내게는 ‘막생’으로 더 친근한 곳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차라 그런지 승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내 좌석은 테이블이 있는 창가 쪽이었다. 빈자리가 많은 것은 나에게만큼은 행운이다.
나는 반 고흐를 좀 더 강렬하게 느껴보고 싶어 기차를 선택했다. 그와 나는 알지 못하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듯하다. 그는 그림에 관해 문외한인 나를 그의 세계로 초청했다.
반 고흐(Van Gogh)는 134년 전인 1888년에 파리의 리옹(Gare Paris-Lyon) 역에서 아를로 향했다.
절친한 친구인 화가 에밀 앙리 베르나르 (Émile Henri Bernard)의 배웅을 받으며 밤기차를 타고 아를(Arles)로 향했다. 그곳에는 동생 테오가 마련해 준 노란 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의 잦은 음울한 날씨와 달리 아를(Arles)의 뜨거운 태양 빛과 풍부한 일조량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였고 반 고흐도 그 대열에 있었다. 반 고흐는 유난히 아를의 따듯한 햇살과 빛을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1888년 2월부터 이듬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로 가기 전까지 15개월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완성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다.
반 고흐 (Van Gogh)는 1853년 3월 30일 벨기에 국경에 가까운 네덜란드 쥔더르트(Zundert) 작은 마을의 개혁교회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첫아들을 잊지 못해 두 번째 아들에게 죽은 아들의 이름을 물려줄 만큼 큰 아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버지와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이름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늘 내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반 고흐는 자기가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그게 고흐의 불행을 자초했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는 가난한 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과격한 정치적 행동을 선동하는 등 비참할 정도의 빈곤이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화가들의 화폭에는 서민들의 궁핍하고 절박한 삶보다는 과일, 꽃, 예쁜 정원이라든가 또는 현실과 상상을 섞어 자유롭게 심상을 표현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이유는 그런 그림이 잘 팔렸다는 것일 게다. 그것 역시 시대적 배경과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반 고흐의 초기 작품(1885년)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화가들은 칙칙하고 지저분한 인상으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반면 반 고흐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감자를 먹는 농부는 내 그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실제적인 사람들의 삶을 담기 위에 노력했다. 그의 시선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담아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낡은 구두, 호롱불 밑에서 비싼 커피 대신 물을 놓고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담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난을 통과할 때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게 되어 있듯이 반 고흐의 그림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절박한 의지가 느껴져서 아리다;
그의 삶은 마법의 시간에 갇힌 것처럼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의 벽과 마주하며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내야 했다. 가난은 물론이고 정신질환이라고도 하는 질병마저 그를 괴롭혔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유일하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종교와 아버지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관심받기를 갈망한 자신을 해바라기에 투영시켰다.
그 불멸의 천재적인 화가를 조금만 일찍 알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예술가들은 궁핍과 재능을 바꾼 사람들 같다. 재능을 가졌으나 현실적으로는 궁핍함을 면치 못했으니 말이다. 굶주림과 절박감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참 비정하다. 살아생전 알아주면 어디가 덫나나;
나는 반 고흐의 급작스런 발작은 풀리지 않던 삶의 잔향이 실타래처럼 엉킨 채로 탈출구를 찾지 못해서 터진 폭탄이라고 생각한다. 죽기 직전 테오에게 말한 기록이 테오의 일기에 남아 있다.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이 살아서 추앙받지 못하는 이유가 예전에는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은 시대를 앞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동시대에 사람들은 미처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비뇽에서 내려 작은 기차로 갈아타고 1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작은 역 ‘아를’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볼까 하다가 반 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테라스>와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이 된 두 곳의 실제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여 반 고흐의 카페를 최종 목적지로 하고 일단은 론강(Rhône) 쪽으로 걸었다.
론강(Rhône)은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유럽에서 유일하게 지중해로 통하는 길이가 무려 813km나 되는 아주 크고 긴 강이다. 험한 산과 복잡한 주변 지형을 거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지나가기에 그 풍경에 매료된 예술가들로 너도 나도 화폭에 이 강을 담았다. 론강(Rhône) 하류에 위치한 곳에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 아들(Arles)이 있다. 아를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갈리아(Gallia)의 작은 로마'라고 불렸다. 아직도 고대 시대에 지어진 원형 경기장과 극장이 남아 있다.
햇살이 따가웠지만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쉽게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가 얼마나 위대한 화가였는지 알게 되었다.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한 강으로만 보였는데 그는 도대체 어떤 영혼의 눈을 지녔기에 그토록 환상적이고 격정적인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는지 위대하게만 보였다.
론강을 벗어나 마을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예쁜 꽃이 가득히 창문 발코니에 드리워진 한 집에 눈길이 절로 갔다. 마침, 한 분이 나오셨는데 집이 예쁘다고, 무슨 꽃이냐 묻고 싶었지만 소통이 불가했다. 그분은 영어를 못하셨고, 나는 프랑스어를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상시 사용하는 눈빛 소통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는데 할머니는 소녀처럼 수줍어하셨다. 할머니는 이곳에 모든 역사를 알고 계시겠지. 더 나눌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한 7분 정도 더 걸은 것 같은데 어디선가 북적북적 높은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중심지 포럼 광장(Forum Square)이 곧 나왔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반 고흐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카페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 (Le Café Van Gogh)가 보였다.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하면서 휴대폰 충전을 도와 달라 부탁하고 실내로 들어가 2층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2층에서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한 분위기에 놀랬다. 그의 자취를 찾아 이 카페까지 오는 방문객의 마음을 아는 듯 카페에는 온통 반 고흐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깥 날씨는 화창했고 광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활력이 느껴져서 좋았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충전이 별로 되지 않았을 휴대폰을 켰다. 내일 이곳에서 남편이 된 그 사람과 만나기로 했는데 파리에 도착한 이후부터 이틀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는 탔는지 왜 소식이 없는지 살짝 불안하기 시작했다. 아를 역에 도착해서 보낸 문자에 답장은 와 있겠지 싶어서 카톡을 열었다.
커피나 마시고 볼 것을;
길고 긴 문장으로 된 여러 개의 카톡을 보는데 불길했다. 내가 포르투갈어를 읽을 수 없으니 번역기가 필요했다. 배터리의 양은 아슬아슬했다. 조금이라도 기다릴 수 없어 부리나케 복사해서 붙이기를 하고 보니 기가 막힌 내용이었다. 그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는 아빠가 필요해” “아빠 가지 마.”라고 딸이 아빠를 붙잡았다는 거다. 그래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해보질 않았었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눈에서 눈물이 후... 두둑 떨어졌다.
나는 아빠가 필요해, 아빠 가지 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는데, 그 시간이 일순간에 끝이 나고 시험이 시작된 듯 고통스러웠다. 절망감; 실망감.... 현실을 마주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일이 혹시 있지 않을까 싶어 출발하기 전에 여러 번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괜찮다고 했었다. 그때 말했다면 내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전처럼 한국과 브라질을 오가면 될 일이었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수도꼭지 열린 듯이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다. 심연에 숨겨진 버림받음의 상처가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왜 미리 말하지 않고, 왜 미리 대책을 세우지 않았는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갑자기 이렇게 하면 나는 어떡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