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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21. 2022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며;

자기 사랑을 위한 새로운 시작 

반 고흐의 고통까지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충격으로 뇌에 전원이 나간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고립된 감옥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 하나가 순식간에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고갱이 떠난 후 반 고흐의 격정적인 충동이 투영된 것처럼 나는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저 아를에 도착하면 ‘파라다이스’가 열릴 것처럼 생각한 내가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다. 배신의 상처가 유전자에 새겨진 황소자리인 나는 격분했다. 그동안 괜찮다 여겼던 의식의 세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려는 듯 심연의 부유물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 진격해왔다.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원초적 감정들이 들썩거리며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버려진 느낌이 넘실넘실 춤을 추어대는 듯했다.  


무엇보다 나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겨우 이런 일로 휘청거리는 나를 보는 것이었다;


눈물 그까짓 거 좀 보이면 어때;

조금 전까지 있던 그 평화롭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행복해 죽겠다던 감정은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는가; 이리도 가벼운 것이었는가; 연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바라보는 종업원의 눈길이 의식되어 커피도 마시지 않은 채로 그냥 나와버렸다. 그렇게 와보고 싶었던 그 카페에서. 


당장 오늘 밤 어디에서 자야 할지 막막했다. 숙소부터 구해야 했지만 지도가 통째로 지워진 것 같았다. 

목표를 잃은 채 방황하는 중이라고 ‘표식’이라도 하려는 듯 강둑에 가방과 노트북과 신발을 올려두고 흐르는 강물을 보니 내 마음과 상관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론강이 미워졌다.  

"그래 너는 원래부터 내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그래 그랬던 거야." 애꿎은 강에게 퍼부었다. 


독립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신이 일부러 나를 테스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반 고흐가 이 건물 3층에서 카페테라스를 그렸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 

고개를 푹 숙이고 돌바닥을 보며 걷는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어떤 남자가 ‘카페테라스’가 그려질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솔깃 귀가 열렸다. 원래 그 시절 반 고흐는 동생 테오가 주는 돈으로 생활하던 가난한 시절이라 저런 카페에 자주 갈 수 있었던 형편은 아니었다고. 아마도 저 집 창문(화분이 걸려있는 3층 방)에서 밤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화폭에 담았을 거라고. 흥미로웠고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의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혹시, 근처에 저렴한 호스텔이 있는지 소개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가이드들은 숙소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남자는 일단 투어를 끝내고 식사하러 가는 중이니 1시간쯤 후에 다시 만나면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아를이란 곳이 고대로부터 아름다운 마을로 아주 유명했고, 지금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얘기는 모두 상술에 불과한 과대광고처럼 보였다. 그냥 내 눈에는 낡아빠진 프랑스 시골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마을처럼 보였다. 희망이 꺼져버린 지금 무엇이 눈에 보이겠는가; 



반 고흐는 두 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는데 같은 장소를 아주 다르게 표현했다. 왼쪽 그림은 그가 아를에 막 도착해서 그렸던 그림으로 붓끝에서 희망이 묻어났다면, 오른쪽 그림은 폐쇄된 정신병원의 병실에서 그린 것으로 그의 생각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휘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동일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 같다. 내적 심리상태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이 경험을 아를에서 생생하게 체험해보게 되었다. 



1시간쯤 후에 만났고 그는 숙박료로 얼마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약속이 불발된 상황에서 경비를 아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해서 호스텔 수준으로 구해달라 했다. 그는 팀이 마르세유 쪽으로 갈 건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겠느냐고, 방을 셰어(Share)하면 어떤지 물었다. 금액은 20유로만 달라고 했는데 마치 내 지갑을 들여다본 듯 말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빠른 시간 안에 아를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좋다고 했다. 뒤이어 식당에서 사람들이 나왔고 앞자리에 앉는 배려를 받았고 나는 가급적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들판 위로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니 더 처량해졌다. 그렇게 40분쯤 더 달렸을까 싶을 때 오른쪽에서 빛이 보였다. 석양은 남은 빛을 모두 주고 가려는 듯 번쩍였다. '쿵쿵쿵'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일몰은 마지막 호흡을 내뿜는 것인지 강렬히 제 몸을 태웠다.  
그 순간이 어찌나 황홀한지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흐르고 있던 눈물이 제대로 멈췄다. 



20여분을 더 지나 럭셔리한 호텔에 도착해서 안심했는데 우리가 사용할 호텔은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 10분쯤 더 갔을까. 한 곳에 도착했는데 미서부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복도식 모텔처럼 보여 실망되었지만 나는 을이었다. 먼저 올라가라고 해서 방문을 열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달랑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럭셔리 여행팀이라면 리조트형 호텔(방 2개)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하는가; 똑같은 실수를 연거푸 두 번이나 하다니;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처음부터 확인하지 않았는가; 레슨을 받는 것 같았다.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와 한 방에서 잘 수 있나; 

뒤 따라온 그 남자는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빨리 무마하려는 듯이 본인은 바닥에 자면 되니까, 나보고 침대를 쓰라고 했다. 머뭇거렸더니 그나마 이 호텔에 남은 마지막 방이고 근처에는 호텔도 없다고 했다.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남녀 혼용으로 사용하는 호스텔로 생각하자, 기내에서 자는 거라고 생각하자 등등 합리화를 했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오늘 경험한 사건을 약간 얘기했다. 그리고 남자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정말로 그가 왜 약속 장소에 오지 않은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

그 남자는 거침없이 말했다. 사랑한다면 약속 장소에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묻지도 않은 본인 얘기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여행하고 다녔고 그 와중에 여자와 잠깐씩 살아도 봤지만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계약에 매이는 일은 너무 촌스러운 것 아니냐고.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고 말했다. 그 말이 더 기가 막혔다. 사람들은 모두들 이렇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그렇게 살고 있나? 너무 혼란스러웠다. 


억지로 불 끄고 자려는데 창문으로 바람이 많이 들어온다며 춥다고 했다. 나는 홑이불을 덮고 그는 담요 한 장으로 맨바닥에 누운 것 같은데 돈을 적게 낸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추우면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초등학생들처럼 침대에 경계선을 지으며 서로 선을 넘지 말자고 했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나의 옆모습이 무척 매력적인데 혹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잠시 흐른 뒤 “긴장하고 있느냐?”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차라리 손을 잡아보면 그런 긴장감이 사라질 거라며 손을 좀 달라고 했다. 어정쩡하는 사이에 내 손을 꽉 잡더니 어떠냐 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굴렸다. 가방 2개는 왼쪽에 있고, 겉옷은 가방 위에 있고 신발은 옆에 있다. 그러니 1,2,3 이렇게 하면 된다고 동선을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여기서 잘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잠버릇이 심해서 실수할까 걱정이 된다. 20유로는 돌려받지 않을 거니 신경 쓰지 마라. 이제 나는 일어나서 나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어둠 속에서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을게요."라고. 


이제 어떡할 거야. 새벽 1시가 넘어가는데;

난 그 길로 곧장 일어나 달아나듯이 방을 빠져나왔다. 철재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밖으로 나와 보니 허허벌판이고 어디에서 방을 구해야 할지 다시 막막해지려는 순간 오른편에서 남자 몇 명이 걸어오고 있었고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멀리 불빛이 보였고 불빛을 따라 부리나케 뛰었다. 캐리어에서는 파리의 새벽 공기를 가르던 것과 너무나 다른 둔탁하고 거친 소리가 났다. 호텔 문을 힘껏 밀었고 카드가 결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방을 안내받고 방문을 여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료해졌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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