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본 졸업 06화

7. 일본의 역사 강박증 1편

by 지식공장장

콤플렉스는 그 대상의 결핍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대상을 분석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역사적 자긍심을 찾다

일본역사 교과서, 역사책을 보면 묘한 점이 보인다. 우선 구석기 시대는 12만년 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문명을 갖춘 청동기, 철기 시대는 기원전 3세기 경부터 4세기까지 이어진다. 최초의 근대 국가가 4세기에 탄생한 ‘야마토(大和)’다.


다른 나라보다 문명이 늦은 것도 특이점인데, 이 야마토조차 중국 쪽의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일본의 기록에서 나오는 것은 6세기 ‘아스카 시대’다. 이래서야 마치 야마토가 해적질해서 먹고 산 나라 같다.

모순점도 나온다. 일본은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벼농사 기술을 배워서 발전했다. 이는 흔한 현상이다. 세계에 명성 찬란한 로마 문명도 에트루리아 문명에 그리스 문명이 융합되면서 이뤄졌다. 우리도 중국으로부터 받은 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일본은 이렇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
아니 한국에게서 뭘 받았다는 게 은근히 분한 모양이다


한반도에서 온 소수의 사람들을 보고 일본인이 벼농사를 창조했다는 식으로 4~6세기에는 독자적인 찬란한 문명이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창조한다.


역사가 짧은 나라, 무언가를 받아서 발전한 나라라는 점이
일본인의 역사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를 싹 씻어낼 대 사건이 터진다. 1981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4만년전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의 업적이자 쾌거였다. 이렇게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 당연히 이 사건은 일본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가 되었고 그는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영웅이 되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90년대까지 그의 발굴은 이어졌고 급기야 70만년전 유물까지 발굴하면서 그는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위인이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사기였다는 것이다.


발굴이 잘 되는 것도 희한한데 수많은 고고학자 중 역사적인 발굴을 후지무라 신이치 단 한 사람이 독차지하는데 의문을 품은 마이니치 신문의 취재팀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의 발굴 현장에서 잠복, 그가 유물을 몰래 묻는 장면을 포착했다. 하지만 이를 바로 공표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를 공표한 것은 후지무라가 해당 유물발굴을 세상에 발표한 후였다. 이에 대해 독점인터뷰를 요청하고 그 과정에서 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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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일본 열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렇게 그가 발굴한 모든 유적에 정밀조사가 시작되었고 무려 180곳의 유적 중 162곳에서 조작흔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가짜 유물은 문화재 지정 취소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그의 흔적이 지워졌다.


문제는 이 의혹이 밝혀진 과정이다. 마이니치 신문의 기획보도는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한창 유명할 때도 후지무라의 발굴에는 많은 의혹이 따라왔다. 발굴된 석기의 재질이 주변 재질과 다르다는 것, 석기인데 철로 조각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 후지무라 이외의 사람이 그곳을 아무리 뒤져도 같은 물건이 안 나왔다는 것 등 부지기수였다. 결정적으로 수상한 것은 해외에서 요청한 공동조사, 추가조사를 모두 거부한 것이다. 보통은 발굴조사에 들어가는 자금압박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투자를 원하는 게 정석이니까.


희한한 것은 이런 이슈가 계속 지적되었음에도
유물조작이 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개인주의를 가진 국민이라도 전체를 위한 시스템이 되는 일본사회에서는 전체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사람을, 정확히 말하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시스템에 편입되기 거부하는 사람을 ‘비국민’으로 매도한다. 관동대지진때 조선인 학살을 거부해도 비국민,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지 않으려고 해도 비국민, 미국의 공세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자는 데 반대해도 비국민이 되었다. 시스템에 반대하는 개인의 생각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발굴에 대한 의심은 일본의 역사적 정당성 구축을 위한 시스템 앞에 번번히 무너져 나갔던 것이다.

일본사회는 설령 집단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 의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그 반동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바보로 만들면서 10년간 지킨 신화가 신기루였다는 사실은 일본에 상당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더 뼈아팠던 것은 하필 한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점이다. 이 조작사건 이후 일본에서 세계역사에 영향을 끼칠 발굴물이 나오면 세계의 역사학계가 일본학자는 제쳐 두고 한국 학자를 우선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일본 내부에서 일본 학계가 유물을 발굴해도 한국 학자가 검증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한일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양국의 역사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양치기 소년이 된 일본 입장에선 속 쓰린 일일 것이다.



한중일 콤플렉스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언제나 중심에 선 국가였다. 그들이 자신을 세상의 중앙에 있는 ‘중국(中國)’이라고 평하는 것은 괜한 허세가 아니었다. 그들의 문화는 한반도로 전파되었고 이렇게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자연스럽게 중국은 한반도와 열도의 문화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파 받은 쪽의 문화가 꼭 뒤처진다고 볼 수는 없다. 인류역사에서 한 문화를 받아들여 더 나은 것으로 꽃피운 경우가 한 두 번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일본만 하더라도 해외에서 발매된 상품을 ‘개선’해서 더 나은 제품으로 만들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국가다. 하지만 역사문제는 다르다. 각국이 오리지널을 주장하며 싸운다. ‘직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문화가 전파되었다. 이 부분에서 일본의 콤플렉스가 드러난다. 일본은 위치상 자신이 받은 문물을 전파할 나라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은 우수한 일본의 문화를 전파했다는 시나리오인데 그게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공식 기록이 없어 교차검증을 통해 이론을 세우는 탓인지, 일본의 역사학은 사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적이 많다. 이런 경향은 가장 오래된 정사인 ‘일본서기’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책에는 647년 신라의 권력자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왔다는 기록이 있다. 표현으로 보면 일본이 너무나 강력한 국가라서 신라까지 쥐고 흔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한국, 중국의 기록을 교차검증하는 과정에서 무너진다. 양 국의 기록에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일본에 1년 있다가 바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이 과연 인질일까 사신일까?


일본의 이런 편의 주의적 왜곡은 꽤 많다. ‘임나일본부설’도 이렇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한반도의 기록자체가 일본보다 우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국기록과 교차 검증하면서 일본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국가가 직접 지원해가면서 이런 역사 창조(?)에 힘을 쏟는다.


올바른 역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한 역사연구를 하는 모순이 일어난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병적이다. 아니 한국에 대해서만 병적이다. 아스카 시대 쇼토쿠 태자는 일본의 문화, 정치, 사회시스템 만들어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업적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쇼토쿠 채자의 최측근 중 ‘하타노 가와카스(秦河勝)’라는 인물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신라에서 건너온 ‘진하승(秦河勝)’이었다.


그는 정치, 외교면에서 여러가지 업적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신라에서 준 보물을 ‘고류지(広隆寺)’라는 절을 지어 안치시킨 것이다. 이 보물이 그 유명한일 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백제의 보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과 똑같다고 해서 일본국보 1호가 일본이 만든 것이 아닌 백제에서 온 것이라며 발칵 뒤집어진 그 물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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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게 못마땅했던 듯하다. 그래서 관광객을 위한 고류지의 설명문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진하승은 중국 진나라 진시황의 후손이다


즉 진하승은 중국인이며 중국을 통일한 훌륭한 피를 계승한 사람이 일본의 토대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고로 한국인은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진시황의 성씨가 진(秦)씨가 아니라 영(嬴)였다는 사실이다. 진시황의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이라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고 갖다 붙였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이 설명문은 거센 비난을 받고 사라졌다.


일본은 중국도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문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이 문명을 만들어 대륙에 전파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힘들다.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은 6세기 아스카 문명부터이며 그 이전 3세기 ‘야마타이국’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이 유일하니 중국을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하다못해 한국이라도 기록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실제로 야마타이국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은 이를 잘 말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2019년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NHK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당 소속의 도쿄 스기나미 구의원 사사키 지나쓰는 “조선통신사는 문물전파를 한 사신이 아닌 범죄자 집단

”이라고 발언해서 물의를 빚었다.


정당의 입지도 낮고 그가 제명처분이 논의될 정도의 인사인지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국민이 원하는 꿈을 보여줌으로써 표를 얻는 정치가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


사진 6-3.jpg 손흥민 선수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같은 성씨이므로 그도 일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글까지 나왔다


역사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왜곡이 아니다. 그 왜곡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우선 중국의 경우, 현재 지배층인 공산당에 관련된 역사는 철저하게 편집하고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일본과 싸울 때 공산당이 정권을 위해서 국민당을 배신, 일본의 침략을 부채질한 사실은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 이 외에도 6.25때 북한과 소련을 도와 남침한 사실도 교육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미국과 남한이 동맹군인 북한을 선제 공격했다고 가르친다. 이유인 즉 현재 정권을 잡은 것이 그 공산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중국인에게 멋모르고 말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멱살 잡히기 딱 좋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초창기에는 일제가 벌인 ‘토지조사사업’이 조선의 땅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절차가 있었는데 조선인이 무식하거나 새 제도에 적응하지 않고 버티다가 국가에 압류당했다는 식의 가짜 교육이 이뤄졌다.


이유는 당연히도 ‘이 과정에서 수혜를 입은 지주’가 해방 후 대한민국 정권의 기득권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과정이 불법적인 수탈이라면 땅을 돌려 달라는 소송이 이뤄지거나 국가압류를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사람들이 역사를 쓴다고 했던가, 덕분에 오늘날까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불법성은 없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국가는 많지만 자랑스럽기만 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극소수다 보니 구글에서 역사왜곡에 관한 키워드(Historical negationism, Distorting History)로 검색을 해보면 몇 달, 아니 몇 년은 쉬지 않고 읽어도 될 정도로 다양한 역사왜곡 사례 그리고 주변국들의 맹렬한 반발을 접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떠올리니 새삼 궁금해진다. 아베 신조와 일본회의가 그리는 방향은 어디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그들이 가진 콤플렉스를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물러설 수 없다

1853년 7월 8일 미국의 페리함대는 오늘날의 도쿄만에 입항, ‘공포탄’으로 막부를 위협하면서 강제로 개항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도쿠가와 막부는 철저한 쇄국을 밀어붙이면서 자신들은 데지마를 통해 교역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런 모순은 역날의 검이었다. 외세로 인한 이득은 얻었지만 외세에 약한 국가를 만들어 버렸고 개항의 책임도 독박을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막부에게 차별받던 죠슈번, 사츠마 번이 왕정복고를 빌미삼아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유신세력은 1867년에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대정봉환' 을 실시 일본은 덴노 중심의 국가가 된다.


중요한 것은 100여년전에 세워진 메이지 정부의 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주역들, 전범 세력이 만든 기반을 이어받은 사람이 현 일본 정부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습을 타파한 메이지 정부는 구시대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거침없는 변혁을 통해 일본을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의 새로운 시스템은 점점 변질되고 있었다. 정부가 점점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1910년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난다. 메이지 세력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정당 활동이 활발해졌고 선거권 확대, 노동환경 개선 등의 요구가 이때 일어난다. 정부는 이에 반발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사건을 거치며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군국주의 정부의 파시즘 정권이 출범한 것이다.


이렇게 덴노는 정부에게 잡아먹히고, 정부는 군부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이 되었다. 군부는 거침없이 폭주했다. 정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장쭤린을 암살하고 , 류탸오후 사건, 루거우차오 사건 등으로 꼬투리를 만들어서 이를 핑계로 침공했다. 나중에는 난징대학살까지 일으켰는데 이 이유가 30만명을 학살해서 중국정부에 충격을 안겨주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한국에 대한 무역규제도 충격을 주면 알아서 굴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런 식의 기습은 일본의 전매특허다. 그리고 항상 실패했다.

이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처참한 학살에 분개한 중국인들이 똘똘 뭉친 것이다. 게다가 세계열강도 자극시켰다. 조선같이 먹을 것 없는 국가야 줘버려도 좋지만, 중국은 다르다. 세계 열강이 서로 먹고 싶은 알짜배기였다. 그래서 협약을 만들어서 서로를 견제하던 건데 일본이 이를 보란듯이 무시하고 서구권의 먹이를 건드린 것이다.


이런 폭주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은 처음엔 고철 수출 그리고 이어 석유 및 물자 수출을 중단한다. 고철 수출 중단의 결과는 우리도 잘 알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반도의 절의 종을 다 떼어가고 밥그릇과 수저, 밥지을 솥까지 다 빼앗았다.


하지만 석유는 빼앗을 곳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미국석유 의존도는 무려 76.7%였던 것이다. 미국의 요구는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폐기하고 중국에서 전면 철수하는 것, 즉 미국의 이권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거대 이익을 포기할 수 없던 일본 군부는 1941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도조 히데키를 수상으로 전쟁내각이 출범한 것이다.


역사서를 보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광기로 인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술사 관련 책을 보면 기습을 성공시킨 후, 협상을 시도하면 성공적인 결과(고철, 석유수입 재개)를 얻을 수 있는 기습이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일본은 선전포고없이 진주만을 공습했고 이것이 미국내의 항쟁의지를 불태워 대통령조차 일본과의 전쟁을 막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전술 ‘힘을 보여주면 알아서 굴복하겠지’는 항상 실패했다.


주요 자원이 끊긴 국가가 전 세계 생산량 50%를 좌우하는 거대 공룡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 해군연합함대가 무력화되자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같은 무리한 전술에만 매달리며 버텼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식으로
국민들의 목숨을 깎아가며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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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기 전까지 미국여론은 무의미한 전쟁을 하면 안된다는 고립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어설픈 공습으로 여론은 정의를 위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국의 참전은 세계사를 바꾸게 된다. 잘 나가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는 비보가 되었다.


반면 영국 등 연합군에게는 희소식이 되었다. 단 미국은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전쟁이 길어지고 사회전체가 소모되는 순간, 무의미한 전쟁을 수행하는 정권에 대한 비난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포츠담 선언' 을 하지만 일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정한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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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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