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본 졸업 04화

9. 전범: 세상을 태우는 불씨가 되다.

by 지식공장장

청산하지 못한 과거, 망각을 위해 달려가다.



불씨가 살아나다

미국은 일본을 둘로 분할해서 힘을 못쓰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소련의 남하, 중국의 참전이다. 이 국가들은 사회주의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면 사회주의 세력이 동아시아를 지배해서 미국의 영향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 행사를 위한 첨병으로 만든 것이다.


둘째, GHQ에 모순이 있었다. 전범을 처리해서 전쟁의 화근을 없애고 싶었지만 정작 최고책임자인 덴노를 살려준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덴노를 처형하면 일본에서 거대 폭동이 일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범은 놔두고 실무자만을 처벌해야 했다.


셋째, 무능했다. 앞서 말했듯 GHQ는 일본을 제대로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경제문제가 심각했다. 그래서 결국 통치 과정에서 일본 전범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사회주의 열풍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에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대항 세력을 키워 이를 막아야 했다. 그렇게 일본에선 전범들이 풀려났고 한반도에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풀려났다. 또한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강행했다. 하지만 이는 졸속 조약이었다. 빨리 처리하기 위해 조정과 대화가 어려운 피해국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남한, 북한을 배제시킨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졸속으로 처리되면서
동아시아 각지역의 영토분쟁이 발생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발 빠르게 파악, 이승만 라인을 선포, 독도를 실효지배한 것이다. 그조차 안 했으면 독도는 이때 일본땅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동아시아에 분쟁의 씨앗을 낳았다. 일본의 전범 세력을 그대로 살려 놓음으로써 우경화의 씨앗을 남겨놓고 말았다. 이렇게 면죄부를 받은 짓밟힌 일본의 극우는 ‘미국에 의해 잃어버린 주권과 긍지’를 찾기 위해 힘쓴다. 당연히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덮는 쪽으로 국가가 움직이게 된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권력자는 없으니까.

이렇게 핵심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핵심 전범은 일본의 권력을 새로 만들어낸다.


전범, 뿌리를 내리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56~57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현 총리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만주국을 세우는데 기여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이며 승전국을 대상으로 한 전쟁행위자중에서 덴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탄생한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가 일본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기시 노부스케는 다른 관료들이 정치라인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별도의 행보를 걷는다. 농상무성으로 들어가 상공관료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눈 앞의 출세를 버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제국주의 이후, 태평양전쟁 패배 그리고 한국전쟁이후의 일본경제의 흐름을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기업인과 관료는 돈을 더 벌지만 서민층은 굶어 죽는 상황은 청년장교들이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군부는 1931년 나카무라 대위 피살사건과 완바오산 사건을 활용 일본내에서 반중여론을 만들어냈다.


의도적으로 갈등을 일으켜, 지지하는 여론을 만든 것이다.

이후 관동군의 혼조 사령관은 1931년 9월 18일, 일본 정부, 육군본부에 통지하지도 않고 중국에 대한 공격을 실시한다. 이에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도 동참, 조선주차군 4000여명을 급파, 전화가 확대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국제연맹의 항의를 받고, 이에 지친 일본정부 관동군의 조기 철병을 약속한다. 하지만 일본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점령을 하지 않되 독립국가를 만들어서 실질적으로 점령’하는 꼼수를 발휘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국제사회에 관동군 철병을 약속한 기존 내각을 사퇴시키고 새 내각을 입각시켜 그들의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세운다.


0301_만주국2.jpg 만주국은 일본이 광기에 빠져들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전 정부의 약속이니 현 정부와는 관계없다고 우겼다. 이에 따라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가 탄생,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이름뿐인 집정관으로 앉는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는 꼭 회사가 등장한다. 조선에 ‘동양척식회사’가 있었다면 만주국에는 ‘만주철도회사’가 설립된다. 이름처럼 철도경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운송수단을 총괄하며, 심지어 식민지 경영을 위한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거대 시스템이었다.


여기 참여한 사람 중 하나가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가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운 사람인것이다. 이렇게 그는 관동군 참모장인 도조 히데키와 친구가 되고 이 인연으로 1941년 도조가 전시 총리가 되자 상공대신으로 임명되고,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는 등 성공일로를 달린다. 하지만 이 좋은 관계는 1943년 도조가 상공성을 폐지하고 모든 권한을 군수성에 몰아주면서 금이 가더니, 1944년에는 사이판이 함락되자 군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각을 총 사퇴시키면서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 이후 일본은 패전하고 그는 고향에서 체포된다.


이때 그를 살려준 것이 ‘다른 선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만주국 문제 때문에 승전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처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GHQ는 일본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일본 경제 사정을 잘 아는데다 뛰어난 실무능력, 아니 일본 경제정책의 핵심인 그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재였다. 결국 기시는 도조가 처형된 다음날 불기소 처분, 공직추방조치만 받는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독립한다. 살아남은 전범과 일본의 황족, 화족들도 고스란히 예전의 지위를 되찾았다. 기시의 공직추방조치도 이때 풀린다.


기시는 자주헌법 제정, 자주군비 확립, 자주외교 전개(오늘날 아베 신조의 주장과 닮았다)를 슬로건으로 일본재건연합을 결성하고 중의원 선거에 임했지만 선거에서 대패, 이후 여러 당에 입당하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자유당에 입당, 중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요시다 시게루총리가 대미협조, 경무장 조치로 자신과 반대 노선으로 나가자 이에 반발하다가 1954년 자유당에서 출당된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자유당에 복당되고 보수대연합을 결성, 1955년 통합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을 세운다. 이렇게 만들어낸 정당에서 기시는 1956년 총리로 선출되어 일본권력의 정상을 차지한다.



전쟁이 가능한 정상국가?

기시 내각의 목표는 ‘전쟁이 가능한 정상국가’라는 얼핏 들으면 이해가 가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60년 미국 34번째 대통령 ‘아이젠하워’와의 회담 끝에 동년 6월 19일, ‘미일안보조약’이 비준된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과 맺은 기존의 불리한 조약을 뒤엎는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출동조항 폐지

기존의 협약에서는 미국이 일본의 내란 상황을 자의적으로 판단, 내란이 일어났다고 판단되면 오키나와의 미군이 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조항이 폐지된다.


2. 전투행위 가능

기존에는 설령 적국이 일본을 침공해도 무력으로 방위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주일미군이 방어할 수 있었으며 이를 위해 기지와 물자를 일본에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미일 공동 방위가 명문화되어 유사시에는 자위대와 주일미군이 공동으로 외적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정상국가’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하지만 수단이 문제였다. 일본사회의 주류는 기나긴 전쟁에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상국가 정책은 야당인 일본사회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960년 5월 29일, 기시는 국회 본의회장에 사회당 의원의 출입을 막고 조약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이것이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들은 권력의 부당함에 굴복하기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시위대의 규모는 엄청났다. 경시청 추산 13만, 주최측 발표 33만이라는 엄청난 규모였다. 공권력이 할 수 있는 정당한 방법으로 통제가 불가능하자 자민당은 미국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야쿠자에게 금권과 이권을 뿌려서 살포해서 폭력진압을 시도한다. 사실상의 내전이었다.


이때 국민여론을 뒤집는 사건이 일어난다. 강압적인 진압 과정에서 도쿄대의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것이다. 이에 중립에 있던 국민들까지 정부에 등을 돌렸고 역대 전임총리들도 기시의 사임을 권했다. 하지만 기시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아베의 뜬금없는 멘트는 아마 외할아버지의 유전인 모양이다. 이렇게 뜬금왕 기시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위대 출동을 명한다. 일본전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피의 강이 흐르는 일은 없었다. 기시의 지시를 받은 일본 방위청 장관 ‘아카기 무네노리’가 국민에게 총을 들이댈 수는 없다며 총리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아카기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시를 따르던 측근중의 측근, 그마저 등을 돌렸다는 것은 사실상 기시의 아군은 없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시위대는 수상관저를 포위했고 이렇게 막바지에 몰려서야 기시는 백기를 든다. 내각 총사퇴를 지시한 것이다.


IE002485562_STD.jpg 35만의 시위대가 총리관저를 포위한 모습

하지만 기시는 패배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안보조약은 국회에서 각의(비준)된 후 히로히토 덴노의 결재까지 마치고 공인된 것이다.


이렇게 쇼와의 요괴의 전성기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와 한국과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을 속박하다

한일수교 이전, 문화개방 이전에는 일본문물은 고사하고 일본어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를 아는 사람은 많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만주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이었고, 당시 한국의 수반은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은 접점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한국의 운명을 바꿀 결정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남을 앙금도 이때 생기게 된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뜬금없이 이뤄졌다. 한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이 조약의 최대 수혜자는 뜬금없게도 미국이었다. 이 의외성을 이해하려면 현재 한일관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지소미아를 통해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다.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은 한일간의 군사정보를 교류하기 위한 조약으로 북한군과 북한 사회 동향, 핵과 미사일에 관한 정보 등을 공유할 수 있는 조약이다. 혹자는 이 조약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절차상의 문제다. 앞에서 기시가 전쟁가능한 국가를 만들기 일한 일환으로 취한 것은 안보 조약이었다. 한번에 국방권을 되찾았을 때 일어나는 갖은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마찬가지도 지소미아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조약이 아니다. 만약 그 자체로 끝난다면 2019년 8월, 일본의 경제규제보복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한국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을 때 일본이 다시 생각해보라면서 압박을 넣을 이유가 없다.


지소미아는 그 자체로 끝나는 조약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이 기다리고 있다. 이 조약은 한마디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한국정부가 토지와 물자를 지원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지소미아는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시나리오의 초기 단계다.


또 하나는 권력이다. 미국이 세계대전 후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었다. 국가 간의 역학관계는 다르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라고 한국은 중국에 많이 의존하므로 신경 써서 관리할 나라일 뿐이다.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미일한> 연합체제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는 이승만 대통령때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정보교류는커녕 일본과 엮이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이후 대통령들도 마찬가지 노선이라 미국의 입장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일본의 실세와 접점을 가진 것이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미국입장에선 이는 절호의 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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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강제로 화해시킬 것을 결심한다.


이 협상은 말 그대로 강제였다. 양국이 서로 내켜하지 않았다. 우선 일본의 경우 현 내각은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실권을 잡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전쟁을 범죄라고 인정하는 조약이 내킬 리 없다. 게다가 돈 문제도 컸다. 당시 일본의 경제력은 이 보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의무는 만국공법에도 없다며 배상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반대로 한국정부에 역습을 가했다. 조선에서 일본이 철수할 때 남겨놓고 간 사유재산, ‘적산자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 금액은 SCAP가 추산할 때 무려 60억불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한국의 입장은 더 복잡했다. 우선 식민지 시절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때 피해자들이 멀쩡히 유권자로 살아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화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만히 있어도 정치적 부담이 온다는 것이었다. 권력자가 오래 살아남는 방법은 별 것 없다. 국민들이 잘 먹고 살게 해주면 된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정책을 성공시켜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포스코 설립도 채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에서 퇴짜를 맺은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을 당황하게 것은 일본의 역청구였다. 당시 지도층에 소위 적산자산으로 부와 권력을 일군 사람들이 꽤 된 것이다. 이에 한국이 들고 나온 것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었다. 일본이 패전시 모든 국유, 사유 재산은 GHQ에 압류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한국내 일본 자산을 포기할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허점이 많은 조약이었다. 당연히 이 부분에서도 허점을 드러냈다. 국제법상 국제법은 군이 조약 등으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은 국유재산 뿐으로 민간 재산은 처분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즉 이 조항자체가 국제법 위반이었다. 그리고 국제법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에 있었다(이 논리가 강제징용 개인 청구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렇게 양국 기득권, 정치가의 이익에 약점이 생겼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엮여버리자, 양국은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1957년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통틀어 양국이 동등하게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자는 큰 틀의 합의가 나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문제는 쌓여 있었다. 보상금을 낼 것이냐 배상금을 낼 것이냐는 문제 그 규모는 얼마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걸린 것이다.



전범, 불멸을 얻다

원래 이렇게 감정과 이권이 골고루 엮인 협상은 차근차근히 풀어나가야 뒤 탈이 없다. 문제는 그 뒤탈에 별 상관이 없는 (훗날 발목을 잡을 것을 모르는) 미국은 여유가 없었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이 지배하던 사회로 사회주의의 핵심인, 소련의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정책을 물불 안 가리고 펴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지소미아라던가 경제블록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이러니 한국과 일본은 싫어도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 협상은 한일관계 정상화, 기간산업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협상과정은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고구마 수십개를 물 한 모금 없이 한입에 털어 넣는 것 같이 진행되었다. SCAP의 추산만 60억 달러(한화로 7조원)니 우리가 받아야 할 돈은 사실상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받은 돈은 5억 달러(약 6000억원)으로 8.3%에 불과했고 그나마 이 중 2억 달러는 유상으로 지급한다.


이것도 열 받는 판에 일본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이 금액은 전쟁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으로 전달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자신들의 죄에서 도망갔다.
그리고 이 순간 전범은 불멸의 면죄부를 얻었다.


첨언하자면 일본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5억 달러는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50%에 달하는 돈이었던 것이다.



수렁에 들어가다

내가 일본과 일하거나 거래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절대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사 자체에 공짜가 없는 판에 무언가 주면 반드시 답례해야 하는 이 민족이 무언가를 내놓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외환 보유고 50%에 달하는 돈을 회수하기 위한 기획이 움직인다.


이렇게 일본의 한국관리가 시작되었다. 관리의 시작은 예우로 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타국은 이를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경축 사절을 보내지 않거나 격이 떨어지는 외교관을 보내서 대응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사실상 일본의 최고 실세인 기시 노부스케가 사절단을 이끌고 직접 참석한 것이다. 당연히 한국은 일본을 예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박대통령은 기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정치적 조언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를 돕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에서 본전을 뽑는 것이었다.


일본은 상업차관 3억을 추가로 지급한다. 일본이 왜 이리 통이 큰가 싶지만, 사실 이는 ‘원조’라는 이름의 본전치기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다.


이 돈으로 이뤄진 사업 중 하나가 ‘서울 지하철 차관사업’이었다. 서울의 지하철은 일본 부품만으로 만들어야 하며, 이에 8000만엔이 4%대 금리로 한국에 빌려준다.


당연히 갚아야 할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계신다.


이렇게 미쓰비시, 마루베니가 첨병이 되어 투입되었다. 이들 기업은 물가상승 핑계를 대서 1년 만에 납품가를 110% 올려버린다. 이렇게 도쿄에 3500만엔에 납품되는 객차가 한국에선 6500만엔으로 납품되었다. 이렇게 폭리를 취하면서 3억을 발판삼아 기존의 5억도 뺏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은 한국 정치인들에게 뇌물로 제공하고, 그만큼 추가로 뽑아 먹었다.


이는 반성과 사회의 협력이 아니었다.
만사를 돈으로 보는 일본의 입장에선 돈을 되찾을 기회였다.


게다가 졸속협상은 또다른 진통을 낳았다. 일본정부는 지급과정에서 이것이 개인에 대한 청구인지 국가에 대한 청구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개인에게 직접 지급하길 원했다. 인도적인 의도가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통해 지출할 돈을 최소화하고 모든 화근을 이 기회에 싼 값에 털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한국은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답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경제발전에 유용할 생각으로 요청한 것이므로 개개인에게 이를 통지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당시야 독재 국가였으니 설령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도 진압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개인의 청구에 대한 항목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수렁을 낳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주의할 점은 보상금을 유용해서 정치자금을 준 것이 아니라 협상을 유리하게 풀어나가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 즉 민주공화당의 예산에 편입했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한다.


결국 졸속 협약은 여러가지 후폭풍을 낳는다. 당시 언로가 제한적이며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이런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버렸다. 당연히 국민들은 분노, 6.3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선 또 다른 분쟁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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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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