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생활 8개월째 - 2018년 6월
여수로 오면서 세제를 하나 샀다. "하나씩 뽑아쓰면 돼서 편리하고 45 매면 오래 쓸 수도 있다." 이마트 세제 코너에서 판매하는 아주머니의 성실한 판매 멘트에 혹했다. 안사기도 뭐해서 세탁 세제 시장의 얼리어답터가 돼보기로 했다. 거기다 1리터 세제도 사은품으로 주셨다. 사은품과 본품을 합쳐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다.
여름으로 시작해 가을을 지나 겨울을 뚫고 다시 여름이 오고 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하며 8개월이 지났다.그렇게 꿈꿔 왔던 일이었다. '내가 과연 PD가 될 수 있을까' PD를 준비하면서도 PD가 된다는 확신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고 시험 보러 다니면 언젠가는 되겠지 이런 막연한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PD가 됐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PD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요즘이다.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고 심지어 방송에 내가 만든 영상이 나와도 보람이 크지 않다. 촬영은 아직 잘 모르겠고 역시나 편집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편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학보사에서 문화부장을 할 때 만든 코너가 '세얼간이의 문화체험기'였다. 문화를 직접 체험해서 그대로 전달해보겠다는 의도였다. 외부의 인식을 벗어나 직접 기자가 느낀 것을 말하고 싶었다. 보이는 건 편집이지만 경험하는 건 일상이다. 나는 일상을 살고 그 속에서 느낀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촬영을 하다 보면 당연히 편집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건 편집에 필요하겠다 이건 필요 없는 장면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촬영 현장은 많은 스텝들이 기다리고 있고 심지어 카메라 메모리와 배터리도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현실을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연출을 하게 되는데 휴먼 다큐에서도 대부분이 연출된 장면이 많더라. 어떻게 행동하세요 저거 한 번 먹어보세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먹으면 그 사람이 배고프고 먹고 싶어서 먹는 느낌이 영상에 전달되는가. 그렇지 않다. 어색한 연기 혹은 연출이 된다.
일상에서 필요 없는 장면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나비효과처럼 번지고 그것으로 사회는 움직인다. 더불어 그런 사람의 행동은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심한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관찰하고 행동과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촬영 현장에서의 출연자를 나는 그렇게 대할 수 없다. 앞에 두고 질문을 하면서 내가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저걸 어떻게 편집하지, 어떤 말을 이끌어내려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이다. 그렇게 촬영을 하고 찍은 영상물을 바탕으로 편집하고 있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용은 연결되고 있지만 그들의 진실된 생각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편집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다.
파업에 제작거부까지 겹치며 실제 일하기 시작한 지는 4~5개월 남짓 됐다. 아직 많은 촬영과 편집을 해보지 않았다. 너무 섣부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세제를 쓸 때까지는 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PD다. 대학까지 자퇴하고 다시 들어갈 정도로 이 직업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일이니까 최소한 빨래 세제보다는 더 오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오늘 빨래를 하면서 3 봉지 중에 마지막 봉지를 뜯었다. 한 봉지에 15매가 들어있다. 앞으로 빨래 15번을 더 할 수 있다.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빨래를 하니까 15주, 4달 정도의 시간이다. 4 달이면 입사한 지 1년이 되겠다. 그때까지는 해보는 게 좋겠다. 일을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가 몇 장 안 남은 세제를 보고 있으면 10년의 꿈이 너무나 허무하게 기억될 것 같으니까. 방금 한 장 뽑아서 빨래를 했다. 하나씩 줄어드는 세제를 보며 사그라드는 내 꿈의 가치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여수생활 9개월째 - 2018년 7개월
세재를 보며 했던 다짐은 불과 한 달이 가지 않았다. 2018년 7월 입사 한지 9개월이 됐을 때였다.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부서장과 나만 야근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부서장에게 다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부서장은 알겠다며 테이블로 갔다. 무슨 비장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입으로 퇴사라는 말을 꺼내야하는데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한 대책은 없는 채로 결심만 있던 상태였다. 퇴사 이후의 계획은 일단 제처두기로 했다. 일단 ‘퇴사’를 내뱉었다. 두 글자의 단어가 나온 순간 게임에서 적을 만난 것처럼 대결은 시작돼야한다. 누군가는 퇴사를 말리고 누군가는 퇴사를 하려는 지리한 싸움말이다.
부서장은 일단 이야기를 해보자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는 뜻이었다. 왜 그만두겠다는 거냐 이유가 뭐냐. 부서원을 책임지는 부서장의 입장에서 한 부서원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큰 일일 것이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해결을 할 수가 있다. 어떤 문제로 신입 사원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지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피디가 하기 싫다고 했다. 대신 저널리즘을 하고 싶다고 했다.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로 인해 나의 쓸모를 느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피디로서 제작하고 있는 음식이나 교양 정보들은 이미 쓸모가 다 한 거라 생각했다. 콘텐츠로서 재미가 없었고 신선한 정보도 아니었다. 재미없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꼈지만 신입 사원 나부랭이가 지역 방송 제작 시스템의 근간부터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진짜 다큐멘터리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휴먼 다큐도 해보니 모든 게 연출이었다. 편집을 하려면 그림이 필요했다. 대상에 대한 궁금증보다 그림을 신경쓰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피디를 그만두고 기자를 하겠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 기자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부서장은 피디랑 기자의 다른 점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고 제작 방식도 다르다고 말했다. 부서장은 피디도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도 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에 대한 고민보다 내용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었다. 저널리즘에는 치열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서장과 한 바탕 설전을 벌였다. 기자와 피디의 저널리즘에 대해.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안그래도 부서장은 흥분을 잘하는 사람인데 나도 지지 않으려고 하니 폭발 직전까지 갔다. 1시간 반 동안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저널리즘에 대해 토론했다. 누가 보면 대단한 저널리즘의 전사들이 납셨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장면이다. 누군가는 퇴사를 하겠다고 누군가는 그러지 말라고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설전일 뿐이었다.
부서장은 보도부로 옮기라고 했다. 퇴사하지 말고 같은 회사에서 기자를 하라고. 나는 거절했다. 같은 회사에서 피디가 싫어 기자로 옮겼다는 게 부담됐다. 피디 선배들 얼굴 볼 자신이 없었다. 비겁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름 최선을 다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그들에게 피디가 싫어 기자를 하고 있는 후배가 얼마나 신경쓰일까. 나는 남 신경을 무척이나 많이 쓰는 타입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또 여기 생활에 지쳐있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외로웠고 고단했고 무기력했다. 마음의 고통에서 잠깐 벗어나 쉬고 싶었다. 원래 살던 삶의 리듬을 찾고 다시 활기찬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즈음에 사무실에서 많이 듣던 말이 있다. 표정이 안좋다는 말이었다. 왜 이렇게 표정이 죽어가냐고. 이유를 생각해보면 일에 대한 불만이었다. 내가 꿈꿔왔던 피디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사회를 헤집고 다니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실상은 피디는 프로그램을 위해 필요한 부품에 하나에 불과했다. 글은 작가가 쓰고 촬영은 카메라 감독이 한다. 피디는 그걸 가져와서 편집할 뿐이다. 촬영장에서는 필요한 그림을 만드느라 바쁘다. 출연자와 연을 맺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편집 때 부족하지 않게 필요한 그림만 신경쓰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일이 싫어졌다. 출근해서 편집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치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처럼 가기 싫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표정이 안좋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가고 싶기도 했다. 퇴근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고 장거리 연애도 지쳤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여수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원래 살던 곳에 가고 싶었다.
거기다 나는 좀 티를 내는 편이다. 불만이 있는 걸 알리고 싶었다. 나 너무 하기 싫다, 힘들다, 좀 봐줬으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죽상을 하고 다녔었나보다. 마음이 참 어렸다.
그날 저녁 대화 이후로 부서장님과는 어색한 관계가 됐다. 부서장님은 이 자식 진짜 그만두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때문에, 나는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 아직도 애매하게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 게 불편했다. 이 결론은 내가 강력하게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나가면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해야되는 건 지도 몰랐다. 일단 부서장이랑 이야기가 끝나야 사직서를 제출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선배 몇몇이 점심에 밥을 먹으러가자고했다. 아마 부서장님이 이야기를 했나보다. 뭐 힘든 일 없냐. 여기가 언론인으로서 일하기 좋은 곳이 아니다. 대체로 내 이야기를 들어줬고 고민에 공감해줬다. 직접적으로 퇴사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는 주변부를 맴돌았다.
시간이 점점 흘렀다. 나 역시 결정을 확실하게 내리지 못했다. 적금을 들라는 엄마의 말에 지금 거취를 고민중이라고 했다. 적금은 부담일 뿐이니 들지 않겠다고 했다. 부모님에게는 처음으로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경찰을 준비하던 형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형도 이런 상황이니까 너까지 그러지 말라고. 너라도 버텨주라고했다.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나 역시 아직 결정을 못내렸으니까. 주변에 퇴직 의사를 밝히기 시작하면서 퇴직에 따르는 무게는 점점 늘어났다. 부서장님, 선배, 가족들의 만류를 부리치고 나는 나의 길을 가야했다. 그 선택을 내릴만큼 강한 동기가 나에게는 있을까. 다시 서울에 가서 기자를 준비를 하는 게 최선일까. 이런 고민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지났다. 모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범한 삶을 살았다. 퇴사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8월에 태국으로 휴가를 갔다. 고등학교부터 친했던 친구와 단 둘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4박 5일동안 잠을 아껴가며 놀았다. 휴가다운 휴가였다. 9월에는 창사휴일과 방송의 날 휴일로 4일의 연휴가 생겼다. 충동적으로 타이베이행 비행기를 끊었다. 3박 4일동안 혼자 대만을 여행했다. 심심했지만 새로운 국가를 여행하는 건 언제나 남는 장사였다. 두 달동안 해외 여행을 두 번했다. 1년 가까이 달려왔던 삶 속에서 두 번의 달콤한 휴식이었다. 직장인으로서 맞는 처음 휴가이기도 했다. 돈도 충분하고 시간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가끔 해외여행을 가서 즐기는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렇게라면 살아볼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18년이 지났고 나 스스로도 퇴사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 한 여름밤의 퇴사 이야기는 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