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중부휴게소에서
군대를 전역하고 군대 동기와 인천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일주를 떠났다. 인천을 떠나 서울을 가로질러 충청북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자전거족에게 악명 높은 이화령 고개를 마주했다. 해발 548m를 자전거로 올라야 했다. 패기 넘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지만 끝없이 가야 하는 오르막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낑낑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산을 올랐다.
산 중턱쯤 갔을까, 남자 어른과 남자아이가 보였다. 그분들 역시 이화령 고개에 굴복한 채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을 앞질러 가며 보니 남자아이는 딱 봐도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같았다. 우리도 힘든 길을 이렇게 어린아이가 가는 걸 보고 신기한 듯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랑 같이 서울에서 오신 거예요?” 아이의 아빠는 그렇다고 웃으며 얘기했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자전거 일주를 할 생각을 한 아빠도 그걸 따라오는 아이도 대단했다. “자전거 타는 거 힘들지는 않아?” 이번에는 아이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재밌어요.” 아이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자를 앞질러 갔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아빠와 아들이 저렇게 친할 수가 있구나.’
그 이후로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다. 결혼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결혼 후 바람이 있다면 나와 닮은 자식과 함께 놀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다. 아이와 함께 모험을 한다면 기쁨과 슬픔, 인내와 성취를 모두 함께 맛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감정들이 아이를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거고. 그때로부터 8년이 지났으니 이화령을 힘들게 오르던 아이는 지금쯤 고등학생이나 갓 스무 살이 됐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여행했던 그 아이는 아마 자전거 여행의 기억을 안고 세상을 더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지 않을까. 그 아이가 다른 사람과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며 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화령 고개를 넘는 부자가 내 인상에 강하게 박힌 이유는 아마 나에게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빠와 함께 단둘이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정말 많지 않다.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은 주말에 도서관에 가거나 아파트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아니면 절에 가는 정도의 기억밖에 없다. 도서관에 가도 아빠는 본인이 읽을 어려운 책을 들고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럴 때면 형과 나는 만화책이 있는 서가 앞에서 드래곤볼을 집어 들었다. 아빠는 아이와 감정을 공유한다는 개념은 없었고 그냥 같이 있으면 되는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같이 있는 거다.’ 이런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 같다. 그러니 아빠는 늘 혼자 있는 모습이 익숙한 사람, 우리는 알아서 잘 노는 아이들이 됐다.
외할머니댁인 논산에 가는 날이면 항상 멈추는 휴게소가 있었다. 경기도 구리에서 출발해 충남 논산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있는 중부휴게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휴게소는 설레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산해진미가 뷔페식으로 차려진 곳이었다. 하지만 뷔페처럼 모든 것을 골라 먹을 수는 없었다. 떡볶이, 떡갈비, 핫도그, 핫바 중에 단 하나만을 택해야 했다. “이따 시골 가서 밥 먹어야 하니까 하나만 먹어.”라고 어른들을 말했지만 시골에 가면 된장찌개 아니면 김치찌개를 먹을 게 뻔했기에 휴게소 음식들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맛있는 음식 중에 하나를 고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핫도그를 고르면 옆에서 친척 동생이 먹는 핫바가 맛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들의 원픽은 거의 언제나 떡갈비였다. 세모난 떡갈비가 삼단으로 올라가 있는 중부 휴게소의 명물, 한 입 베어 물면 육즙이 좌르르 흘러나오는 감질나는 꼬치였다.
그럴 때 아빠는 항상 알감자 구이를 골랐다. 넓은 철판에 가득한 알감자를 골라 종이 그릇에 담아 소금을 뿌려 먹는 알감자 구이. 지금이야 맛있게 먹지만 어렸을 때는 그 큰 감자가 입에 들어오면 퍽퍽하고 포슬포슬한 느낌이 거북했다. 그래서 감자를 먹는 아빠를 항상 멀리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놀리듯이 한마디를 했다.
“성우야. 감자 먹어봐. 맛있어.”
그러면 형과 나는 손사래 치면서 말했다.
“아 안 먹어!”
그렇게 매정한 말을 하고 나서 우리는 육즙이 터지는 떡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옆에서 퍽퍽한 감자를 먹는 아빠를 못 본채 했다. 아빠에게 매정하게 말을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저렇게 퍽퍽한 감자를 혼자서 꾸역꾸역 먹는 아빠가 못내 측은했다.
논산에 오가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중부휴게소에 들렀다. 친척 아이들은 산해진미 뷔페 중에 떡갈비, 핫바, 떡볶이 등을 골라갔다. 그때 나는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아빠랑 같이 알감자를 먹어보기로 했다. 항상 혼자 먹는 아빠의 옆에서 같이 알감자를 먹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각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아빠는 알감자를 먹기로 한 나에게 큰 대답 없이 알감자를 내어주었다. 퍽퍽한 감자에 소금을 가득 묻혀 한 입 베어 물었다. 감자는 어린 나이에 먹기에 여전히 퍽퍽했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말했다.
“감자도 맛있지?”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냥 그래.”
그 이후에 아빠 옆에서 알감자를 같이 먹은 기억은 많지 않다. 욕심 많은 나는 떡갈비를 우선 선택해서 먹다가 가끔 알감자가 먹고 싶으면 아빠의 것을 하나 가져왔다. 그렇게 퍽퍽한 알감자는 친척 아이들 사이에서 아빠의 독특한 취향을 말해주는 대명사였고 아빠는 항상 혼자만의 세계에서 혼자 있는 사람이 됐다.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여수라는 낯선 도시에서 지낸 지도 4년째였다. 아빠가 코로나로 당구장 문을 닫고 3주 동안 여수의 공사 현장으로 왔을 때 느꼈다. ‘아빠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머리는 원래 30대부터 풍성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고 건강했던 몸의 근육들이 많이 빠지고 너무 마른 모습이었다. 3주 동안 같이 지내며 아빠와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지냈다. 주말이면 저녁마다 회에 소주를 마시고 여행도 다녔다. 이렇게 아빠랑 시간을 보내는 게 값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점점 말라갈 것이고 언젠가는 지금처럼 돌아다닐 기력이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아빠는 자전거를 좋아한다. 가끔 가족 카톡방에 자전거를 타고 어딘 가를 간 사진을 올린다. “팔당댐에 가서 파전 반쪽에 막걸리 한잔했다. 나는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해유.” 막걸리를 좋아하는 아빠는 자전거를 타려고 팔당댐에 갔는지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러 갔는지 모르겠다.
“아빠 그거 음주운전이야. 술 깨고 타.”
이화령을 넘던 부자를 떠올렸다. 이미 다 컸지만 아빠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같이 고생하고 같이 기뻐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다. 우선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가까운 한강이라도 같이 라이딩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집에는 로드 자전거, 전기 자전거 두 대가 있었다. 로드는 아빠가 타고 전기 자전거를 내가 타면 될 것 같았다. 자전거 타는 복장을 한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같이 타러 가자”
당연히 좋다고 말할 줄 알았던 아빠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여기 잠깐 나갈 거라 괜찮다”
팔당댐까지 가는 게 아니라 잠깐 앞에 갈 거라 혼자 갔다 오겠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아들이 같이 가자고 하는데 같이 자전거 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기대한 대답과 다른 대답이 나와 당황스러웠다. 아빠는 혼자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빠는 이미 혼자가 너무 익숙한 것 같았다. 중부휴게소 알감자를 혼자 꾸역꾸역 먹던 모습처럼 자신의 취향을 꼿꼿이 유지해온 결과인 것 같다. 혼자가 당연한 아빠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함께한 시간보다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기에 같이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 억지로 알감자를 먹었던 어린아이 때처럼 억지로 하는 것일지라도 함께인 기억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시간은 혼자 알감자를 먹는 아빠가 아니라 옆에서 푸석한 알감자를 같이 먹어주는 아들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알감자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 떡갈비는 오히려 너무 달짝지근해서 끝 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빠 이제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