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남원에서
4월이었다. 꽃 피는 봄,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앞둔 시기, 갑자기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분명 몇 달 전 설까지는 건강한 모습이셨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시다는 걸까 싶었다. 어렸으니까 설명을 들었어도 잘 몰랐다. 평소 다리에 핏줄이 많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큰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빠가 부산에 가자고 했다. 학교를 빠지고 부산에 가니까 일단 신났다. 엄마는 할머니 간호하려고 미리 내려가 있었고 아빠와 형이랑 나, 세 남자는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과자랑 마실 것을 사서 여행 가듯 자리에 앉았다. 형이랑 옆자리에 앉아서 장난도 치면서 가는데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예, 예.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끊은 아빠는 이내 코를 훌쩍거렸다. 뭔가 잘못됐다. 장난기 많던 나와 형은 꼼짝없이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할머니 11시 30분 시간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 잘 가라고 인사해라.”
시뻘건 눈을 한 아빠가 와서 말했다. 우리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은 다른 자리로 갔다. 아빠와 형, 나는 서로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 코를 훌쩍거리면서 울었다. 평일 대낮, 부산으로 가는 조용한 버스에는 세 남자의 훌쩍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부산 침례병원에 도착했다. 형과 나는 할머니 사진 앞에서 많이 울었다. 땅바닥을 부여잡고 서럽게 울었다. 버스에서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와 마지막 순간이었다.
“할매가 참 좋아하겠다. 애들이 이렇게 할매를 좋아해서.” 작은 숙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애들이 할머니를 참 좋아했지. 성우가 집에 가기 싫다고 울어서 부산에서 하루 더 있기도 했잖아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할머니가 애들과 좋은 기억만 안고 갔을 거예요.” 진이 빠져 누워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엄마가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형과 부산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병원 앞에 있는 아무 분식집에 들어갔다. 길쭉한 가래떡 하나로 만든 부산 떡볶이가 있었다. 잘라서도 주고 기다랗게도 주는데 우리는 한 줄씩 잡고 먹었다. 병원 앞 부산 떡볶이의 첫맛은 잊을 수 없다. 매콤하면서 달짝지근한 떡볶이 소스가 굵은 가래떡에서 나오는 고소함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우리는 5줄을 더 먹고 만 이천 원을 냈다. 컵 떡볶이가 겨우 500 원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떡볶이가 만 원을 넘는 경우가 없었다. 가격을 잊을 만큼 떡볶이가 맛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병원 앞 벤치에 앉았다.
“형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어딘가에 계실 것 같고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 병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말했다.
“나도 그래. 왜 이렇게 믿기지가 않지?”
언제든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배부르게 한숨 자고 나면 다시 할머니가 “잘 잤나"라고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누군가와 제대로 이별을 해본 적이 없는 나이였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병원 밥 대신 부산 떡볶이를 몇 줄씩 먹었다. 떡볶이를 먹고 벤치에서 얘기하며 우리는 삶의 감각을 다시 찾아갔다. 처음 맞이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부산 떡볶이는 너무 맛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는 부산 떡볶이가 주는 아주 사소한 감각의 차이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다.
유독 부산 할머니를 좋아했다. 넉넉한 풍채에 안기면 따듯하고 포근했다. 부모님은 하지 말라는 것, 해야 할 것을 말했지만 할머니는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셨다. 강하고 드센 사람만 있던 가족 중에 여리고 내성적이었던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분이었다. “따듯한 우유 타 주세요.” 할머니는 우리가 부산에 도착하면 우유 분말에 따듯한 물을 타 주셨다. 그 하얀 가루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 돌아와서 프리마를 먹어봐도 분명 다른 맛이었다. 따듯하면서 기름기 없는 포근한 맛이었다. 그건 아마 부산 할머니의 맛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따듯한 마음이 담긴 우유였다.
지금도 부산에 가면 할머니가 살던 곳을 종종 찾아간다. 부산 시청에서 내려 연제 시장을 지나 할머니에게 다가간다. 가는 길에 떡볶이도 하나 먹고 할머니가 사주던 통닭집의 닭 냄새도 맡는다. 아파트 복도를 지나 할머니가 사시던 15층에 올라간다. 15층 문밖에 서서 집 안을 상상한다. 풍채 좋은 할머니가 우리를 맞이하며 요리하는 모습, 할머니가 요리하는 주방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동해선의 기차 소리, 우유 분말을 타 놓고 끓이는 주전자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는 집의 모습을. 나는 미련하게도 할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1995년 4월 4일 할머니와 남원에 갔다. 춘향이가 탔다던 그네에 할머니가 있고 내가 줄을 밀고 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 모습을 아빠가 카메라에 담았다. 아빠는 뷰파인더 너머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를 낳아준 부모를 내가 낳은 자식이 밀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살아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 아닐까. 부모는 나를 세상으로 밀어내고 나는 내 자식을 세상으로 밀어낸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무한한 삶의 반복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나를 깨닫는 것이다. 이렇듯 삶은 순환한다. 나의 할머니는 우리에게 사랑을 나눠줬고 나의 부모님 역시 나의 자식에게 사랑을 나눠줄 것이다. 이 거대한 세상에 사랑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한 생명이 모든 사랑을 소멸하면 그 사랑을 받은 생명이 또 다른 생명에게 그 사랑을 나눠준다. 사랑은 그렇게 순환의 고리를 그리며 이어진다.
할머니가 나에게 준 사랑은 분명 내 안에 흐르고 있다. 따듯한 우유 같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다니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은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머금고 그다음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2004년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한다.
"할매 잘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