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망우리에서
가수 겸 방송인 이지혜 씨가 둘째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방송에서 귀여운 모습을 보여줬던 첫째 태리에게 동생이 생긴 것이다. 둘째가 태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이지혜 씨가 울먹거리며 유튜브에 모습을 나타냈다. 태리가 동생을 거부한다고 했다. 엄마나 아빠가 동생을 안은 것을 보는 것도 싫어서 동생과 부모를 떼어놓으려고 떼를 쓴다고 했다. 태리가 저렇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동생이 태어나면서 자신에게만 향하던 부모의 사랑이 동생에게 뺏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이처럼 둘째가 태어날 때 첫째가 질투하는 현상은 대부분의 가족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왜냐면 우리 형은 어디를 가든 사랑받는 망우리 대스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둘째라고 태어난 동생이 4.2kg 우량아에 누가 건들기라도 하면 울어버리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처음부터 형과 나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형의 인기는 공고히 유지됐고 나는 엄마 품에만 안겨 있는 마마보이가 됐다. 대신 인정 투쟁에서 애초부터 밀린 나는 삐돌이가 됐다. 희미했던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울고 삐지고 성질을 부렸다. 자립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이었다.
그 모든 배경 상황이 이 사진에 담겨있다. 형이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나는 뒤에서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형은 신기하리만큼 해맑은 웃음을 보여준다. 낯도 잘 가리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 빵긋 웃어주는 아역 배우 같은 아이였다. 반면에 나는 뒤에서 멍하니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조금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사진에서도 우는 모습이 없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아이는 울음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울어야 어른들이 자신을 어르고 달래주면서 욕구를 충족시켜주니까. 내가 죽어라 울어댔던 것처럼. 그런데 형은 저렇게 웃기만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다 충족시켰던 걸까? 동네 사람 누구에게나 가서 안기며 관심을 받는 게 형의 생존 전략이었을까? 해맑게 웃는 형의 모습이 신기하다.
이렇게 다른 두 아이였지만 우리는 잘 지냈다. 어려서부터 어디를 가나 붙어 다녔다. 사실 내가 형을 따라다녔다고 하는 게 맞겠다. 망우리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형을 따라 동네 또래 아이들과 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주말이면 교회든 절이든 항상 형과 함께했다. 방을 같이 썼던 우리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불을 끄고 나서도 새벽까지 깔깔거리면서 떠들었다. 엄마가 “좀 자!”라고 하면 자는 척을 하고 있다가 또 깔깔거렸다. 부모님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 “쟤네 둘이 커서도 같이 산다고 하는 거 아닌지 몰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잘 웃고 리더십 있는 형이 좋았다. 형을 따라가면 항상 재밌는 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형을 나는 곧잘 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진에 찍힌 형의 웃음에 변화가 느껴졌다. 형은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웃고는 있었지만 웃음의 느낌이 달라 보였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게 확실히 의식이 될 때는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때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형은 카메라를 의식했을 거고 그 뒤의 아빠와 어른들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군대를 갔다 온 뒤부터 형이 달라졌다. 입대 전 대학 생활에서는 세상을 씹어먹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살던 사람이 뭔가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군대에서 불면증으로 고생해서였는지 전역 후 다녔던 회사에서의 인턴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대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를 쓰는 게 느껴졌다. 힘들어도 아무 일도 없는 척, 자신이 없어도 자신이 있는 척,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척, 어느새 형을 대하고 있으면 내 말이 형에게 닿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억지로 웃는 형의 사진 같았다.
필요한 게 있어 형 책상을 뒤졌다. 그러던 중 형의 대학교 성적표를 보게 됐다. 한창 취업을 준비해야 할 4학년 성적표에 어울리지 않은 알파벳들이 있었다. f, f, d, c... 학사경고를 간신히 넘어선 수준이었다. 집에 와서는 부모님께 학교에서 교수님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랑하던 형이었다. 이 정도면 수업을 제대로 듣고 있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학교생활 대신 뭘 하고 다니는 걸까. 형은 근처 피시방을 전전했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가족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간 것이다.
형의 방황이 가장 심할 때 부모님에게 말했다. 차라리 따로 사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래도 부모님은 형을 두둔했다. 형이 잘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저대로 나가면 더 잘못될 것 같다고 말했다. 냉정하지 못한 부모님의 선택이 당시에는 답답했다. 오히려 그게 형을 위한 길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저렇게 이쁘고 잘 웃던 아이였는데. 가면일지라도 여전히 똑같은 웃음을 보이는 자식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저 해맑은 아이의 성장을 아빠가 찍은 사진으로 따라가게 된다.
세 번의 회사를 거쳐 형은 경찰 시험에 도전했다. 형의 나이 31살이었다. 신입으로는 조금 늦은 나이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도전을 했다. 이번에도 가족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1년 만에 시험에 붙어 경찰이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집에 오는 길에 강변역에서 우연히 형을 만난 적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학교에 다녀서 통학길에 이렇게 마주치곤 했다. 강변역에서 버스를 타고 구리로 오는 길에 형과 이야기했다. 집에서는 굳이 얘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렇게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형 요즘 기분 어때?” 한참 부모님과 갈등을 겪고 있던 형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요즘 나를 잘 모르겠어. 화를 내는 것도 웃는 것도 다 내가 아닌 것 같아. 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가면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게 박혔다. 형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던 걸까.
아마 장남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부담 때문 아니었을까. 친가, 외가 모두에서 형은 첫째였다. 양쪽 집안의 모든 총애를 받고 태어난 형은 해맑은 성격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시에 집에서는 첫째라는 이유로 많은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따라 좋은 대학에 가면 좋겠고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을 잘 통솔했으면 좋겠고 양가 어르신들과 부모님에게 잘하길 바랐을 것이다. 형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런 무게를 짊어졌을 것이다.
이제는 형이 좀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향해 최선을 다해서 가봤으면 좋겠다. 더 이상 집안의 장남이 아닌 형 자신으로 존재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다시 한번 철없이 형과 장난을 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