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2월 25일 아빠 동국대 대학원 졸업식에서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친가 쪽 사람들을 많이 뵀다. 친할머니 5촌 조카분이 오셨다. 수다스러우셨던 그분은 장례식장을 떠나면서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우리 호천이 부부. 호천이는 고대 건축, 며느리는 고대 상대니까 얼마나 자랑스러워.”
장례식장 한 편에서 멍 때리고 있던 나에게 ‘고대 상대’라는 말이 꽂혔다. 대학은 엄마와 연결된 적 없는 이질적인 단어였다. 엄마는 논산시에 있는 반곡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엄마 나이 10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품앗이로 이어가던 삶은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학비 한 번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기 위해 상고에 진학했다. 할머니 조카분이 뭔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걸까. 장례식장 입구에 있는 엄마를 봤다. 엄마는 민망한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엄마는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와 일을 하다가 아빠를 만났다. 결혼하던 당시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엄마가 고졸, 그것도 상고라는 게 내심 걸렸던 것 같다. 아들은 부산에서 고려대를 보냈는데 며느리라고 데리고 온 여자가 고졸이라고 하니 말이다. 지금도 결혼을 할 때 학벌이나 경제력 같은 조건을 본다. 예전이라고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혼을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그래도 체면을 차리고 싶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친척들에게 며느리가 고대 상대를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셨던 거다.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쓴 엄마의 사진을 봤다. 아빠의 대학원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이다. 엄마는 어린 형을 안고 조금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사진을 보면 마음이 조금 아프다.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입었지만 진짜 졸업하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고졸 엄마의 마음은 당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고대 상대 나온 며느리'라고 말하던 조카분의 말을 듣는 엄마의 표정도 이 사진과 다르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건가 보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 외식을 하게 되면 아빠 흉을 아빠 앞에서 대놓고 볼 때가 많다. 그중 하나가 부부 동반 이야기다. 이 사진을 보고 글을 쓰겠다고 하니 이런 얘기를 했다. “아빠 대학 부부 동반을 가면 아내들도 다 서울에 있는 여대를 나오거나 대학은 나왔는데 엄마만 고졸이었어. 그래서 엄마가 얘기하려면 눈치가 보이더라고. 혹시 잘못 얘기했다가 고졸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할까 봐. 다음부터는 부부동반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잘 안 갔어.”
나는 2018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받아 엄마에게 학사모를 씌워드렸다. 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졸업장을 자랑스럽게 펼치고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부모님 덕분에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졸업하는 모두가 같은 의미로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자식 대학을 졸업시켰다는 자부심을 엄마가 느꼈으면 좋겠다.
4년간의 대학 교육이라는 게 시간을 들여 학문을 공부하는 거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보장은 없다. 엄마처럼 대학 교육 대신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집의 경제적 기반을 만든 건 엄마의 선택들이었다. 아빠가 회사 다니면서 불교 공부하고 있을 때 아파트로 이사한 건 엄마의 선택이었다. 그런 현명한 선택들이 우리 형제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했고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했다. “나중에 보니까 부부동반에서 봤던 대학 나온 아내들이 지금은 이혼했거나 잘살고 있지 못하더라. 아빠 친구들도 이제 다 엄마랑 결혼한 아빠를 부러워하더라. 엄마는 이제 당당해.” 부부 동반 이야기로 아빠 흉을 보던 엄마는 마무리는 꼭 자기 자랑으로 빠져나갔다.
“우리 며느리 고대 상대야”
세월은 흘렀고 거짓말을 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영면의 길에 들으셨다. 장례식장에 오셨던 5촌 조카 분도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셨다. 시간이 지나면 엄마를 고대 상대로 아시는 친척분들이 모두 돌아가실 것이다. 거짓말을 바로 잡을 거짓말의 당사자도, 거짓말을 들은 사람도 모두 사라질 때 ‘호천이는 고대 건축, 며느리는 고대 상대 나와서 아들 둘 잘 키우고 잘 살았대’라는 이야기는 사실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