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논산에서
아빠가 처음 차를 샀던 때는 1994년쯤이었다. 아빠는 둘째 이모부가 타고 다니던 엑센트로 중랑구의 한 공터에서 운전 연습을 했다. 나와 형은 뒷자리에 앉아서 신나게 드라이브를 즐겼다. 아직 신혼이라 점수를 따야 했던 둘째 이모부는 답답한 아빠의 운전 실력에도 ‘허허’ 웃으며 운전을 알려줬다. 아빠 역시 운전을 잘못했는데도 웃으며 운전을 배웠다. 이 관문만 넘으면 드디어 차가 생겼으니까.
아빠의 첫 차는 대우자동차에서 만든 르망이었다. 르망이라는 이름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레이싱 대회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페라리 같은 슈퍼카들이 즐비한 대회의 이름을 가져와서 자동차에 고급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자동차 이름은 유럽식으로 지어서 세련된 느낌을 주려고 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었으니까 선진국을 한창 따라잡을 때였기도 했다. 대우자동차의 르망은 당시 가격 600만 원 대로 1993년에만 6만 대가 팔린 대표적인 중형 세단이었다. 현대 소나타, 기아 엘란트라, 대우 르망 이 세 차량은 90년대 초반 한국의 호황기를 대표하던 마이카 시대의 대표적인 차량이었다. 르망과 함께 아빠도 국가적 상승기에 가뿐하게 올라탔다.
르망에서 떠오르는 첫 기억은 중랑구에서 구리시로 이사 오던 날이다. 망우리의 골목길에서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망우고개를 넘었다. ‘환영합니다 여기부터 경기도 구리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우리 가족을 반겼다. 신도시답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 사이를 달려 새로운 집에 들어섰다. 르망 뒷좌석에 앉아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한가람 아파트’ 하늘과 맞닿아있는 높디높은 아파트 벽면에는 새로 칠한 깨끗한 아파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르망과 함께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대한민국의 중산층 가정으로 이동했다.
가난했던 논산 양촌면 거사리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게 된 게 자랑스러운 일이었을까? 부모님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르망과 함께 시골에 행차했다. 아빠는 자동차 앞에서 위풍당당한 중산층의 위용을 뽐냈고 엄마는 르망을 끌어안았다. 부모님은 허물어져 가는 시골집 마당에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르망과 시골집, 이질적인 두 사물을 뒤로하고 아직은 중산층의 삶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부모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차를 샀다. 비록 2010년식 아반떼hd였지만 내 차가 생긴다는 느낌은 너무 낯설었다. 차를 사는 게 부담스러워 계속 미뤘다. 여수라는 지방 도시에 살게 되면서 탈 것이 필요했지만 차는 사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다니면서 세상을 느끼는 게 피디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공유 자전거를, 다음에는 전기킥보드를, 그다음에는 스쿠터를 탔다. 스쿠터를 타다 빗길에 미끄러져 쇠골이 부러지면서 수술을 했다. 퇴원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차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큰 결심 끝에 380만 원짜리 중고차를 샀다.
느낌이 이상했다. 내 차라는 게 생기고 나서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는 걸 직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고 부모에게서 독립했지만 차가 생긴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차라는 공간만큼 책임감이 커졌다고 할까. 중형차의 5자리 공간과 트렁크만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공간이 된 것이다.
차가 생기고 나서 가족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논산 할머니 집에서 친척들이 모일 때면 여수에서 나는 제철 해산물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갔다. 장어며 굴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볼 때 흐뭇했다. 부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여수에서 차를 타고 가 구리에서 기차를 타고 온 가족들을 태우고 다녔다. 그때만큼은 내가 이 집의 가장이 된 것 같았다.
한복을 차려입고 부모에게 새 차를 보여주는 엄마 아빠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사람은 네발로 기어 다니다 걷게 되고 성인으로 성장해 부모 곁을 떠난다. 그리고 차라는 새로운 걸음걸이로 부모님을 마주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차를 타고 부모를 마주하는 순간인 것 같다. 내 차를 갖는 순간, 차의 빈자리에 나의 자식과 나의 부모를 함께 태우고 이동한다. 부모와 자식이 모두 나를 바라보는 상황에 인간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