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구리시 한가람 아파트에서
생일이 두 개인 아이
나는 두 개의 생일을 가지고 있다. 1991년 3월 13일 오후 6시 반, 실제 내가 태어난 날과 1991년 3월 13일의 음력인 1월 27일이다. 공교롭게도 주민등록상의 내 생일은 실제로 태어난 날이 아닌 음력이었던 1월 27일이 됐다. 7살에 학교를 보내기 위한 엄마의 선택이었다. 그치만 빠른 생일이었던 형을 보며 학교에 빨리 보내는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엄마는 나를 8살에 학교에 보내셨다. 그렇게 탄생한 1월 생의 8살 등교는 이후 삶에서 두고두고 ‘1월 생일인데 왜 8살에 학교 들어갔어?’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게 했다. 그때마다 나는 “머리가 안 좋아서 유치원에서 1년 더 공부했다”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문제는 이미 주민등록에 사용된 날과 실제 태어난 날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점이었다. 1월 생일로 살아가려고 해도 빠른으로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고 3월 생일이라고 말해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날이다 보니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너 1월 생인데 왜 3월에 해” “1월 생일인데 왜 8살에 학교 들어왔어” 이런 질문들에 어린 시절의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집에서도 크게 생일을 챙기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내 생일은 365일 중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로 넘어갔다.
초등학생 때는 생일 때 친한 친구들에게만 생일 초대장을 만들어서 건네주는 문화가 있었다. 초대장을 받으면 ‘너는 내 친구로 선택됐어’라는 느낌에 들떴고 초대장을 주는 아이는 30대에 들어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사람처럼 고심 끝에 생일에 초대하는 친구를 정했다. 초대장을 받고 친구 집에 가면 입구부터 치킨의 기름 냄새, 떡볶이의 매콤한 냄새, 피자의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한상 가득 놓인 식탁에는 학교에서 본적 없던 늠름한 친구의 모습과 그걸 지켜보며 ‘너가 성우니?’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네는 친구의 엄마가 계셨다. 맛있는 음식들이 부러질듯하게 놓인 식탁과 한없이 상냥한 친구의 부모님의 모습에 어린 시절의 나는 왠지 모르게 위축됐다. 내가 갖지 못한 모습들에 대한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1년에 단 하루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생일 앞에서도 나는 언제나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생일에 올 친구를 선택하는 권한이 없었던 나는 언제나 선택받는 친구가 됐다. 언젠가 돌아올 친구의 생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했던 나는 꽤나 눈치를 보는 성격이 됐다. 나의 기질과 성격, 선호보다는 친구의 성격에 맞게 나를 다듬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무색무취의 인간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애매한 생일과 그걸 따로 챙겨줄 정도로 세심하지는 않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나에게 생일은 그저 피하고 싶은 날이었다. 누군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면 “오늘은 생일이 아니”라고 축하해주는 것을 피했다. 1월 27일에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 ‘원래 생일은 3월 13일이야’라고 하고 3월 13일에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 ‘음력이라 1월 27일이 생일이야’라고 했다. 두 개의 생일은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는 나에게 도망가기 딱 좋은 도피처였다.
덕분에 나는 확실히 방어적인 사람이 됐다. 누군가에게 여간해서는 먼저 잘 다가가지 않았다. 연애도 인간관계도 내가 적극적으로 관계의 시작을 만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 생일날 친구들을 먼저 선택해본 적이 없던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본적도, 누군가를 거절해본 적도 없었다. 선택받지 못하는 느낌은 또 싫어서 적당히 선을 지키는 관계 정도에 머물렀다. 선택하는 책임은 없고 거절당하는 상처는 싫은 그런 어른이 됐다.
부산에서 자란 경상도 남자 아빠, 가난한 시골에서 첫째로 살아온 논산 여자 엄마. 누군가를 챙겨줄 경제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던 부모님에겐 없었던 것 같다. 7~8살 때쯤 화이트 데이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라는 것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들었다. 엄마에게 사탕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모아뒀던 쌈짓돈을 털어 파리바게트에 전시돼있던 사탕 세트를 샀다. 1998년 당시 만 오천 원이었으니 굉장히 큰돈을 들인 사탕이었다. 나무 바구니에 한가득 담긴 사탕을 들고 엄마에게 줬지만 결국 사탕을 환불해왔다. 이렇게 큰돈을 들여서 이런 걸 사면 어떡하냐는 말이었다. 엄마는 마음은 알겠지만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걸 사 왔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선물을 사는 것에도, 인간관계에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켰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하고 알맞은 선.
2020년 9월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모를 모두 여읜 아빠는 “이제 고아됐다”는 농담 섞인 말을 했다.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아빠는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사진첩에 찍어뒀던 옛날 사진들을 스캔해서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부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갔던 어린 시절의 사진들을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추억했다. 사진을 보다 보니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참 많았다. 지금은 적당한 관계인 형과는 어느 사진에도 항상 붙어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지금은 한결 차분해진 나는 사진 속에서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깎이고 다듬어져 둥그런 사람이 된 나는 사진 속의 나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사진을 보다가 한 사진에서 눈을 멈췄다. 촛불이 붙여진 케이크를 불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였다.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둬서 의식하지 못했던 나의 생일 모습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생일 축하합니다~사랑하는 성우의 생일 축하합니다~’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초를 한 번에 후~ 불어내라고 했을 부모님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동안 생일이 없었다는 생각 속에 자신을 방어하며 살아왔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매번 생일을 챙기지 못할 수도 있고 모든 친구들이 그럴듯한 생일잔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생일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걸까. 생일잔치를 못했다는 걸로 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던 것도 이 사진을 보며 많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인식하고 가치관을 갖는 것은 찰나의 인상으로 생겨날 수도 있는 것처럼 그것을 해체하는 것도 한순간의 사진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32살, 나는 이제 부모님이 나를 낳았던 나이가 됐다. 지금 나이가 되니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사진에 찍힌 나를 보며 카메라 뒤 표현하지는 않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을지, 아주 어렴풋하게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사진 한 장에 몰랐던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다. 사진 한 장에 가족의 사랑을 담아 글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