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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우 Oct 28. 2022

70원짜리 브라보콘의 맛

군대에서 전역하고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경기도 구리시에서 흑석동까지 1시간 30분 동안 통학하지 않아도 됐다. 아침이면 꽉 찬 버스와 지하철에서 이미 진을 빠져서 수업을 들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자취를 하게 되면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됐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자취 생활은 허무하게 끝났다. 6개월 만에 다시 본가로 들어가게 됐다. 다른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1시간 30분의 통학길을 다시 감수하게 한 건 다름 아닌 돈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나가는 돈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건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에 보일러, 전기세, 수도 요금까지, 숨 쉬고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돈이 나갔다. 가족들이랑 같이 살 때는 의식하지 못하던 돈이 여기저기서 새어나갔다. 제일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쿠팡에서 생수를 시킬 때였다. 12 페트에 7천 원 정도였는데 물을 많이 마셔서 1주일이면 다 먹었다. 가끔은 물 사는 돈이 아까워서 아무도 없는 늦은 밤 학교 건물에서 물을 떠 오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휴지도 챙겨 왔고.


용돈을 안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매달 필요하면 30만 원을 받았고 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요청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었지만 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기는 했다. 당시 대학교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취재와 기사 작성에 썼다. 알바를 할 시간이 없으니 어떻게든 30만 원 안에서 생활해야 했다.


어느 날 신문사 친구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한 여름이라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이스가 들어가면 따듯한 것에 비해 500원이 비싸서 순간 따듯한 걸 시켜버렸다. 사람들이 이 더운데 따듯한 걸 먹냐고 물었다. “따듯한 거 식혀서 이따 얼음 넣어 먹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잖아” 신문사 친구들은 그 얘기를 두고두고 놀렸다. 당시에는 그냥 친구들을 재밌게 해 주자는 생각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무의식 속에 500원이라는 차이가 번뜩 스쳤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 500원에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대학교 3~4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는 취업에 대한 것이 주된 이야기의 소재가 됐다. 친구들은 대기업의 연봉과 복지 같은 것을 얘기했다. “야 08학번에 그 선배 현대자동차 들어갔잖아. 초봉이 6천이래. 인센티브까지 하면 좀만 지나도 금방 1억 찍겠다.” 연봉이 6천만 원이면 월급이 400만 원이 넘어갈 텐데, 뭔가 현실적이지 않을 숫자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크게 할 얘기가 없었다. 내가 원서를 쓰는 언론사들은 얼마를 주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인지, 피디로 제대로 일할 수 있는지 같은 것이 고려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취업을 해 방송사에 입사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조건이 좋았다. 복지도 좋아서 월급의 절반 이상을 척척 저축할 수 있었다. 바쁜 피디 생활을 보내며 통장은 신경 쓰지 않다 보니 어느새 천만 원 단위의 돈이 통장에 모여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도 돈이 있다는 여유가 알게 모르게 생기게 됐다. 돈을 벌어보니 알게 됐다. 돈이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돈이 있다는 것은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해야 할 것에만 에너지를 쓰고 나머지는 돈으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날씨가 안 좋을 때 어디로 가야 한다면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택시를 타고 빨리 이동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택시를 타면 5천 원이 나오니까 버스를 타는 1250원보다 3750원이 더 비싸고 이 돈이면 내일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안 좋은 날씨를 벗어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5천 원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안 좋은 날씨를 벗어날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나도 많다. 이처럼 돈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게 해 줘서 인생에서 집중해야 할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렸을 때 브라보콘 바닐라맛을 먹는 나를 보면 가끔 엄마가 말해주던 게 있다. “지금은 700원인데 엄마 어렸을 때는 70원이었어. 할머니가 학교 가는 버스비 하라고 돈 주면 그거 아껴서 브라보콘 사 먹고 1시간을 걸어 다녔어.” 어렸을 때 나는 브라보콘을 먹으며 생각했다. 엄마의 어렸을 적은 정말 고달팠겠구나. 브라보콘을 먹으려고 한 시간이나 걷고 말이야.


가난이라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어린 시절을 사진으로 처음 마주했다. 이 사진에는 생각보다 가난이 짙게 드러나지 않는다. 옷은 화사하고 표정을 생기 넘친다. 1980년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엄마의 고등학생 시절의 사진에서 할머니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다. 지금도 그대로인 나무 미닫이 문은 저 시대에는 더 멀끔했을 것 같다.

그럼 가난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저 사진에는 드러나지 않는 주변 친구들과의 격차, 아버지가 없다는 설움, 대학교 갈 돈이 없다는 절망감 등이었을까. 사진을 통해 부모의 마음을 더듬어 간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나에게 물려왔음을 확인하고 이따금 놀란다.


마이클 센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양심과 공정 같은 도덕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줄 서는 것을 예로 들면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줘서 대신 줄을 서게 하면서 본인의 시간을 아낀다고 했다. 하지만 똑같이 시간을 투입해서 줄을 선 사람들과는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미국의 철학자가 말한 이야기다. 나는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추구하기로 한 것이다. 여행을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서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대신 고생 끝에 얻는 끈적한 추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놀이공원을 혐오했다. 사람과의 추억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돈벌이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이제 여행을 가도 좋은 숙소와 맛집을 검색하고 간다. 더 이상 4만 원짜리 민박에서 3~4명이 자거나 편의점에서 육개장과 참치마요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는다. 놀이공원도 간다. 단돈 4~5만 원으로 이 정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다. 넷플릭스만 해도 한 달에 만 원 정도를 내야 해야 하는데 놀이공원에서 신나게 하루를 즐기면 넷플릭스보다 더 큰 가치를 받을 수 있다. 가족 생일 때는 꼭 케이크를 사 간다. 어려서부터 이런 이벤트가 있는 날에 케이크이나 사탕, 초콜릿 같은 것을 사 가면 엄마는 “케이크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사와"라고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케이크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생일 때는 꼭 케이크를 사 갔다. 사람의 기억은 단순하기에 가장 강렬한 기억만 남긴다. 결국 남는 것은 촛불을 끄는 단 한순간이다. 겨우 2만 원짜리 케이크는 그래서 충분히 소비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적재적소에 소비하다 보니 그 전보다 가족관계가 더 좋아졌다. 뿐만 아니라 태도도 더 적극적으로 바뀌게 됐다.



돈보다 중요한 건 너무나도 많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양심과 공정 등의 가치만이 아니라 내 행복, 내 가족이다. 돈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한다면 그건 반대로 돈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쓸 수 있는 곳에 적절하게 돈을 쓰고 나머지 에너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집중한다면 삶은 더 풍족해질 것이다.


가난은 결국 삶의 방식을 바꿔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존재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생각으로 돈을 삶에 이용하는 것이다. 아직 엄마는 가난의 흔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보다 돈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 그런 엄마에게 천천히 더 좋은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브라보콘을 포기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어릴 적 엄마에게 달콤한 바닐라 맛 브라보콘을 쥐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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