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망우리에서
어렸을 때 종종 엄마를 따라 퇴근하는 막내 이모를 마중하러 갔다. 상봉에 있는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이모에게 가던 길은 항상 어둑한 밤이었다. 망우리에 살 때는 동부제일병원 앞에서 버스를 타고 망우시장을 지나서, 구리에 이사 와서는 집 앞에서 51번 버스를 타고 망우 고개를 넘어서 상봉으로 갔다. 엄마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이모를 기다렸다. 자신을 마중 나온 조카를 이모가 빈손으로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붕어빵을, 여름이면 주스를, 더 커서는 닌텐도에 들어가는 게임팩을 사줬다. 공장이 끝날 때가 되니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 이모가 보였다.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이모에게 달려가 안겼다. “우리 성우 왔네~” 봉제 공장이라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온 이모는 늘 그랬듯 웃는 얼굴로 나를 안아줬다.
우리는 왔던 길을 함께 돌아갔다. 버스 두 자리에 엄마와 이모가 앉고 나는 엄마 무릎에 앉았다. 차창 밖으로 상봉으로 가던 길의 맞은편 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이모와 함께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늦은 저녁상을 차렸고 이모는 어린 조카와 놀아줬다. “밥 먹어"라는 엄마의 말에 이모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와 이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렸던 나는 대화의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이 먹던 식탁의 분위기는 기억난다. 4인 가족에 이모들까지 있어서 그래도 더 웃을 일이 많았고 따듯했다. 이모들이 결혼해서 나가기까지 거의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두 명의 이모들과 함께 살았다. 그때는 당연했던 이모들과 같이 사는 일이 돌아보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모들과의 동거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형이 태어나면서 단칸방에서 살던 부모님은 방 2칸의 다세대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그러면서 사진에 보이는 둘째 이모가 함께 살게 됐다. 엄마가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와 이모는 서울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엄마가 결혼하면서 둘째 이모는 혼자 살게 됐는데 우리 가족이 방 2개로 이사하면서 바로 다시 함께 살게 됐다. 엄마에게 누가 먼저 살자고 제안했냐고 물어봤다. “제안? 글쎄 제안은 누가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살게 됐지.” 자연스럽게?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었다는 걸까. 둘째 이모에 이어서 셋째 이모도 성인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서울의 집값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았을 테고 상봉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던 이모들의 넉넉지 않은 월급에 월세는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을 거다. 그러니까 짠돌이 엄마는 “동생들 월세 아까운데 같이 지내는 게 어떻냐”고 아빠한테 말했을 거다. 무던한 아빠는 큰 생각 없이 “그래”라고 했을 거고.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됐다.
방 2개짜리 20평이 채 안 되는 다세대주택에서 4인 가족과 이모 두 명이 산다는 이야기는 TV에서도 보지 못했다. 대가족 문화가 해체된 90년대에 집 안에 큰 어른이 있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모들과 같이 산다는 건 지금 보기엔 꽤 파격적이다. ‘순풍산부인과'에서는 산부인과 원장인 오지명이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아들 박영규와 며느리 박미선 딸 미달이 그리고 고모들인 이태란과 송혜교가 함께 산다. 그런 대가족 구조도 시트콤에서나 나오는 가족 구조였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엄마가 아빠 흉을 보면서 또 부부 동반 이야기를 했다. “너희 아빠가 얼마나 센스가 없는 줄 아니? 부부 동반 가면 다른 남자들은 자기 아내한테 먹어보라고 입까지 넣어주는데 아빠는 먹어보라는 한마디도 없이 자기만 홀랑 먹고 있는 거야.” 그럴 때 아빠는 별말 안 하고 있다가 한마디 거든다. “아니 그거 자기 거 자기가 먹으면 되는 거지~” 괜히 본전도 못 찾을 말을 하고 엄마한테 반격을 맞는다. “그래서 당신이 센스가 없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아빠의 장점이기도 하다. 센스가 없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감각이 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행복한 것도 불편한 것도 우울한 것도 슬픈 것도, 모든 감정에 있어서 무딘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신혼 생활을 이모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모들도 형부와 함께 사는 게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모들이 아빠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아마 같이 사는 동안 아빠가 편하게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칭찬도 크게 말하지는 않는다. 아빠는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지낸다. 누가 나가도 “어디 가냐”고 묻지 않고 본인도 어디를 나간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무던하게 지내는 아빠의 성격 덕분에 불편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것 같다.
어쩌면 아빠 같이 생색내지 않는 사람이 참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려고 하고 불편한 게 있으면 불편한 티를 내려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아빠는 감각 자체를 하지 않아서 그냥 표현할 것 자체가 없었을 수 있다. 학교와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처음에는 살갑고 괜찮은 사람 같다가도 갈수록 실망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사람인데 갈수록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아빠는 후자의 사람 같다. 가끔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순리에 맞게 흘러가듯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사람을 보면 고마운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엄마는 이모들과 사는 게 마냥 행복한 일이었을까? 논산을 떠나 낯선 서울에서 동생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마음의 안정을 주는 일이지만 남편과 아들 둘, 동생 두 명의 살림을 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89년이면 우리 엄마 나이 고작 27살이었다. 27살의 여성이 다섯 사람의 의식주를 해결해나가는 책임은 분명 무거웠을 것이다. 당시 집에는 세탁기가 없었다고 한다. 5명의 빨래를 손으로 일일이 빨아서 ‘짤순이'라 불리는 빨랫감에서 물을 덜어내는 기계에 넣었다고 한다. 평일 낮, 아빠와 이모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두 남자아이와 엄청난 양의 살림을 아직 새파란 청춘의 젊은 여자가 해내고 해냈다. 엄마는 젊음을 바쳐 이모들에게 다음 인생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첫째였던 엄마는 항상 이모들을 챙겼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려서부터 엄마는 집안의 기둥이 됐다. 생존을 위해 품앗이를 자주 나갔던 할머니를 대신해 엄마는 언니이자 엄마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덕분에 이미 중년의 나이가 돼버린 세 자매는 여전히 끈끈하다. 엄마는 여전히 이모들을 걱정하고 챙긴다. 반찬 하나라도 있으면 논산으로 대전으로 택배를 보낸다. 이모들의 자녀들이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마당에 엄마는 여전히 이모들을 예전과 다를 것 없이 대한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자매일지라도 신혼집에서 같이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모들은 우리 집을 떠나 각자의 가정을 꾸릴 준비를 했다. 이모들이 연애를 했고 결혼할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모들은 드디어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고 독립하는 과정이었지만 이모부들에게 우리 집은 잘 보여야 할 대상들이 많은 독특한 가정이었다. 결혼 대상인 이모는 물론이고 같이 사는 아빠, 엄마 그리고 조카인 어린 우리들에게까지 점수를 따야했다. 둘째 이모부는 이모와 데이트를 할 때 우리 형을 데리고 가서 돈가스를 사먹였다. 셋째 이모부는 우리 집에 인사를 오면서 우리들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줬다. “이모랑 결혼하고 신혼 때인데 찬우가 자꾸 이모랑 이모부 사이에서 자는 거야.” 둘째 이모부는 그 때를 생각하며 허허 웃었다. 이모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이모들과 결혼하려면 우리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이의 눈으로 가장 정확하게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모부들은 전부 유하고 사람 좋은 분들이었다.
이모들은 결혼하면서 우리 집을 떠나갔다. 둘째 원경이 이모는 내가 두 살 때, 셋째 원분이 이모는 내가 6살 때 결혼했다. 셋째 이모가 결혼할 때를 기억한다. 6살이었던 나는 이미 이별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셋째 이모와 더 이상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도 성격 좋은 이모부와 함께 살게 된 것에 기쁜 마음도 있었다. 그런 양면적인 감정을 느끼며 이모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상봉 봉제공장에서 퇴근한 이모가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조금씩 짐을 정리하고 있던 이모의 곁에 가서 줄 게 있다고 말했다. 수줍게 뒤에 숨겨뒀던 손에서 선물을 건넸다. 꼬깃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100원, 500원을 모으고 모아 5천원을 만들었다. 6살 아이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이모는 나를 꼭 안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모는 곧 우리 집을 떠났고 우리는 평범한 4인 가족으로 돌아왔다.
나는 항상 여전히 이모들에 마음이 쓰인다. 부정과 긍정의 측면이 모두 얽혀있는 부모를 향한 감정과 다르게 이모들에게는 순도 100%의 고마움만이 있다. 제일 이쁜 게 조카라는 말이 있듯이 이모들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해줬다. 그래서 나도 이모들의 자녀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한다. 친척 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거나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면 괜히 내가 나섰다. 셋째 이모의 큰아들 민재가 전역했을 때와 동생 민경이가 대학에 갔을 때 노트북을 사줬다. 둘째 이모 큰아들 대영이가 경찰 시험 준비를 할 때는 노량진 근처에서 혼자 살던 내 자취방에 살면서 공부하게 했다. 친척 동생들이 잘되게 하는 것이 이모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모들도 모두 5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어 섰다. 세상에 태어나 눈 떠보니 집에 같이 살고 있던 젊었던 이모들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할머니가 돼가는 엄마와 함께 이모들도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길, 운명공동체인 세 자매가 건강하게 살아가길, 이제는 우리와 친척 동생들 걱정은 조금 덜어내고 지금이라도 이모들 자신의 행복을 더 채워나가길.